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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Jan 22. 2024

과공비례의 기원

1편 학이(學而) 제13장

  유자가 말했다. “약속하는 것이 의로움에 가까워야 약속한 말을 지켜낼 수 있다. 공손한 것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한다. 연원이 있더라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아야 또한 소속감을 유지할 수 있다.”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례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유자는 공자와 외모가 유사해 공자 사후 잠시 공문을 이끌었던 제자 유약(有若)을 말합니다. ‘논어’에서 공자 외에 공문제자 중 자(子)라는 경칭이 붙은 네 명(민자건, 염유, 유약, 자여) 중 한 명으로 빈도로 보면 자여(증자) 다음으로 많습니다. 특히 ‘학이’ 편에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발언 내용을 보면 처세술에 가까운 것이 확실히 공자는 물론 자여에게도 미치지 모살 정도로 웅숭깊은 맛이 떨어집니다. 그가 공문을 이끌었던 기간이 왜 짧았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문의 신(信)은 본디 신과 한 신성한 약속이었다가 점차 사람 간 약속으로 바뀌었고 신뢰, 믿음이란 뜻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선 약속으로 봐야 합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인데 그걸 쉽게 번복하지 않으려면 의롭지 못한 약속은 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의롭지 못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크게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공손함도 예에 맞게 공손해야지 부족하거나 과도하면 치욕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법에 비춰 부족하면 오만하다 지탄받고 과도하면 아부한다 지적받기 쉽다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공손함에도 공자가 말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적용되는 셈입니다. 비슷한 뜻의 과공비례(過恭非禮)가 ‘대인은 예가 아닌 예(非禮之禮)를 행하지 않는다’는 ‘맹자’ 이루장에 대한 정이의 해석에서 나왔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사실상 이 장에서 유약의 발언을 풀어낸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 가르침은 그 정확한 뜻을 풀어내기 가장 힘듭니다. 그래서 갖가지 해석이 난무합니다. 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함 풀어볼까 합니다. 춘추시대 또는 중세서양, 일본의 막부시대를 떠올려보십시오. 당신은 태어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의 가문에 귀속됩니다. 원문의 인(因)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당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동으로 당신이 귀속되는 연원을 뜻합니다. 종(宗)은 바로 그 지역과 가문의 종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공자가 살던 시대 이미 인(因)과 종(宗)의 연계가 느슨해집니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맹손 씨 영지에 속한 추읍의 읍재였습니다. 따라서 과거 같으면 공자 역시 맹손 씨를 종주로 섬겨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공흘이 일찍 죽어 공자 일가에 대한 맹손 씨 가문이 내려주던 녹봉이 끊겼고 공자는 자수성가해 맹손 씨 가문의 도움 없이 노나라 대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유약의 발언을 빌리면 실기친(失其親)한 것이니 곧 인연의 끈을 놓친 것입니다.

      

  여전히 장황한 설명이 될 수밖에 없지만 이를 현대적 상황에 적용해 보면 이해가 더 빠릅니다. 한국사회에서 지금도 공고한 지연과 학연이 다 인(因)에 해당합니다. 향우회니 동문회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향우회나 동문회를 멀리하면(失其親) 고향과 모교에 대한 소속감(宗)도 옅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히 유약의 발언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연원이 있더라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아야 또한 소속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현대적으로 의역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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