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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28. 2024

인생의 3가지 보람

1편 학이(學而) 제1장

  공자가 말했다. “배우고 틈날 때마다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왔으니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군자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논어’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구절, 그래서 가장 유명한 장입니다. 논어 최후의 구절처럼 3가지 차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배움의 기쁨, 두 번째는 친교의 즐거움, 세 번째는 세상이 나를 배신해도 성내거나 아파하지 않는 당당함입니다. 

    

  그 구성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첫 번째 감정은 희열(說)입니다. 몰랐던 것을 깨치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터득할 때 내적으로 느끼는 법열입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벌거벗은 채 “유레카!”를 외쳤을 때의 인식론적 기쁨입니다. 

     

  두 번째 감정은 즐거움(樂)입니다. 앞서 언급한 희열이 홀로 느끼는 것이라면 즐거움은 더불어 느끼는 것입니다. ‘논어’에서 붕(朋)은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죽마고우(竹馬故友)에 가깝고, 우(友)는 의기투합한 지란지우(芝蘭之友)에 가깝습니다만 여기서 붕은 후자로 봐야 합니다. 원문의 유붕(有朋)이 본디 우붕(友朋)이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이유입니다. 개별적 존재가 의기투합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날 때의 벅찬 감정을 말합니다. 호모 폴리티쿠스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세 번째 감정은 성내지 않음(不慍)입니다. 세상에 배신당했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서 슬픔과 노여움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說과 樂이 긍정적 감정이라면 不慍은 부정적 감정을 견뎌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변주가 발생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說이 배움과 익힘의 산물이고, 樂이 친교와 우정의 산물이라면 不慍은 군자답다는 평가의 원천입니다. 기막힌 반전이라는 점에서 시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발언이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매우 실존적 질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힘겨운 인생을 견디고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였을 수 있습니다. 말년의 공자였다면 “스승님은 필생의 목표였던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어진 정치를 실현하는 것에 실패하셨는데 그럼에도 인생의 보람이라는 게 있었나요?”였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답은 사실 매우 철학적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앎의 기쁨이니 인식론적 보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개별적 존재를 뛰어넘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날 때 느끼는 벅찬 즐거움이니 존재론적 보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런 기쁨과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토대로 의연함을 견지하는 윤리적 존재로 전회를 보일 때의 보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군자학적 관점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공자가 평생 추구한 호학의 기쁨입니다. 이는 곧 치평의 도를 터득했을 때 기쁨으로 이어지니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와 궤를 같이한다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혈통에 의한 왕위계승의 통치에 반대하고 치평의 도와 수제의 덕을 갖춘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지하는 공화주의적 프로젝트 의기투합한 일군의 전법제자를 확보한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왕조시대 그것은 직접적으로 표출될 수 없기에 과거의 전거를 끌어다 우회적으로 표출돼야 했기에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술이부작(述而不作)으로만 전법되는 밀교적(esoteric) 즐거움입니다.      


  세 번째는 공자가 자신의 삶으로 입증한 ‘수제의 덕’의 궁극적 산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재상의 반열에 올라 일국은 물론 천하에 태평성대를 가져오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습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출사해 노나라에서 고군분투했지만 5년 만에 축출되고 다시 13년간 천하를 떠돌며 자신을 기용해 줄 주군을 찾았지만 처절히 실패했습니다. 제자들 덕에 간신히 고국으로 귀향했지만 ‘뒷방 늙은이’ 취급을 면치 못했으니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외아들 백어(공리)를 앞세워 보낸데 이어 자신의 전법제자로 믿어 의심치 않던 안연과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수제자 자로마저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결국 태평성대에 출현한다는 기린이 시체로 발견되자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을 집필하던 붓을 꺾고 두문불출하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렇게 실패한 인생임에도 공자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거나 근심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오롯이 견지했습니다. ‘논어’에만 여섯 차례나 등장할 정도로 공자에겐 중차대한 테마였습니다. 주문왕에서 발원한 문명질서(斯文)의 열쇠를 자신이 물려받았다는 지명(知命) 의식을 무색하게 만든 현실의 좌절에 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언젠가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볼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윤리적 태도가 인식론적 기쁨이나 존재론적 즐거움 못지않은 인생의 보람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논어의 첫머리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가 아니라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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