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4장
자하가 말했다. “아무리 작은 도라도 반드시 볼만한 점은 있다. 하지만 원대함에 이르는데 구애됨이 있을까 두렵다. 그래서 군자는 소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
자하왈 수소도 필유가관자언 치원공니 시이군자불위야
공자는 도와 덕을 말했을 뿐인데, 자하는 대도와 소도, 대덕과 소덕을 말합니다. 앞서 자장 편 제11장에서 대덕과 소덕을 살펴봤습니다. 군자의 인격적 측면이 덕이며 대덕과 소덕은 그 사람됨의 그릇 차이라 했습니다. 이번엔 대도와 소도의 차례입니다.
도는 나의 내면(我)이 아니라 내 밖의 타자(物)의 작동원리를 말합니다. 작은 모래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인간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를 포괄하는 것이 도입니다. 덕이 자신의 내면에 타자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심고 확장해가는 것이라면, 도는 나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하는 길을 열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도는 개별적 사물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말하고, 대도는 인간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곧 정치에 대한 높은 식견을 말합니다.
대도를 다루는 사람이 대인(大人)이라면 대도를 다루기 위해 연구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따라서 공자가 말한 군자지도는 당연히 정치원리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실천을 말합니다. 이와 달리 소도는 요즘 말로 하면 분야별 전문가들이 깨치고 터득한 것을 말합니다. 주식, 부동산, 바둑, 낚시, 축구, 야구, 피아노, 그림, 노래 같은 모든 분야에도 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도인 셈입니다.
자하는 이런 소도도 분명 볼만한 것이 있지만 원대한 대도를 이루는 과정에서 한눈 파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군자는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밝힌 겁니다. 공자가 살아서 이 말을 들었다면 “아직 멀었구나, 상(商·자하의 이름)아”고 말할 것입니다. 공자야말로 대도만 닦은 게 아니라 온갖 소도에 심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발라드였던 시경의 시 삼백 편을 줄줄 외우고 다녔고, 거문고 연주에 심취했으며, 팔일무라는 춤을 연구하고, 관직명의 연원을 캐고 다니고, 점술서에 가까운 주역에 빠져 살았습니다. 심지어 바둑과 장기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임금 군'자가 들어간 군자(君子)라면 마땅히 치국평천하를 위해 정치라는 대도를 고민하고 연마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천하 만물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도가 숨어 있음을 안다면 그 하나하나의 소도를 깨치는 일 역시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그 소도에 깨달음이 시냇물처럼 모이고 모이다 보면 어느 순간 대도라는 대하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하가 살던 당대에도 사대부라면 마땅히 정치와 외교, 예법뿐 아니라 농법, 어법, 병법, 형법, 세법에 통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앞서 제6장에서 살펴봤듯이 어짊에 이르는 4가지 공부법 중 하나가 가까운 일에서 생각한다는 근사(近思)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자하 자신입니다. 원대한 대도의 원리를 가까운 일에서 생각하는 것이 뭘까요? 그게 바로 소도 아니겠습니까. 제비 한 마리 날아드는 것을 보고 봄이 왔음을 알고, 오동잎 한 잎에서 가을이 왔음을 아는 것이 소도라면, 백성의 함포고복 노래자락에서 성군이 들어섰음을 간파하고, 간신이 득세함을 보고 나라가 망할 것을 아는 것이 대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군자라면 대도를 행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되 소도를 터득하는 것을 걸림돌이라 여겨서도 안 됩니다. 다만 소도(취향)만 성행하고 대도(정치)를 도외시하는 현대인에겐 소도에만 심취해 대도를 익히는 것을 망각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고 따끔한 일침을 놓을 필요는 있습니다. 그렇게 소도에만 심취한 현대의 소인들이 난처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 얘기는 사절.” 공자가 이 말을 들으면 기절초풍하고 노발대발할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야말로 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자에게 정치와 종교 얘기를 하지 말라 할 수 있는가! 그들이야말로 소인 중의 소인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