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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12. 2021

친구를 사귀는 법

19편 자장(子張) 제3장

  자하의 제자가 자장에게 사람 사귀는 법에 대해 물었다.

  자장이 말했다. “자하는 뭐라 하던가?”

  대답하기를 “자하님은 ‘사귈만하면 사귀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자장이 말했다. “내가 들은 바와 다르다. 군자는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되 대중도 포용한다. 잘하는 사람은 칭찬하고 무능한 이는 불쌍히 여긴다. 내가 크게 현명한 사람인가? 그럼 어떤 사람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내가 현명하지 못한 사람인가? 그렇다면 다른 이들이 나를 멀리할 것이니 내가 어찌 그들을 멀리할 수 있겠는가?"     

  

  子夏之門人問交於子張. 子張曰: 子夏云何.

  자하지문인문교어자장    자장왈   자하운하

  對曰 子夏曰: 可者與之, 其不可者拒之.

  대왈  자하왈  가자여지   기불가자거지

  子張曰: 異乎吾所聞. 君子尊賢而容衆, 嘉善而矜不能. 我之大賢與, 於人何所不容. 我之不賢與, 人將拒我, 如之何其拒人也.

   자장왈  이호오소문  군자존현이용중   가선이긍불능  아지대현여  어인가소불용   아지불현여   인장거아  여지가기거인야


  ‘논어’에서 '사람 인(人)'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일반적으론 모든 인간을 지칭하지만 나(我)와 대비해 타인(他人)이란 뜻도 지닙니다. 여기서 인은 후자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착할 선(善)'은 세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악과 대별되는 ‘착하다’가 첫째고, ‘좋다’라는 의미가 둘째고, ‘잘한다’가 마지막입니다. 여기선 마지막 뜻으로 쓰였습니다. '더불어 여(與)'는 뜻이 여럿인데 여기선 ‘함께 한다’는 뜻과 가정의 뜻을 함축한 어조사로 쓰였습니다.  

        

  같은 공문 출신이지만 공자 사후 자하, 자유, 자여(증자), 자장 넷이 각자 학당을 열어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호 비판이 자주 등장합니다. 앞서 자여와 자유가 자장을 재승박덕이라 비판한 대목을 봤습니다. 자유와 자하가 서로를 비판하는 장면도 등장했습니다. 이번엔 자장이 자하를 비판하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을 벗으로 사귈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입니다. 자하는 그럴 만하면 사귀고 그렇지 못하면 멀리하라고 합니다. 애매모호한 대답입니다. 문학적 성향이 강했던 자하답습니다.


  자장은 자신이 들은 것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스승인 공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자하가 하는 말과 달랐단 소리입니다. 사람이 현명하건 아니건 가리지 말고 두루 사귀라는 게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때 동원하는 논리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자하는 가(可)함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자장은 그 기준을 현(賢)함으로 바꿔버립니다. 현(賢)은 인(仁)과 마찬가지로 ‘어질다’로 새깁니다. 하지만 그 용법을 보면 지혜로움이 부각된 어짊입니다. 현명하다는 소리입니다. 그럴만하다는 뜻의 가에 현명함만 들어있을 리 없습니다. 어리석어도 마음 씀씀이가 착하다거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면 그 역시 친구로 삼기에 가한 것이니까요.     


  자장은 이를 우직하게 밀고 나갑니다. 그러면서 현명함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현명한 경우와 현명하지 못할 경우, 두 가지의 경우를 듭니다. 논리적으로는 내가 지극히 현명하다면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으니 친구가 없을 것이요, 내가 모자라 마면 주변에서 나를 친구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 또한 친구가 없을 것이다가 맞습니다.

     

  헌데 이를 비틀어서 ‘내가 크게 현명하다면 부족함 사람을 어찌 받아주지 않을 것인가’로 먼저 휘어 치고 ‘내가 현명하지 못하다면 주변 사람이 먼저 멀리할 것이니 내가 어찌 멀리할 수 있겠는가’로 맞받아쳤습니다. 듣는 사람이 좀 더 숙고할 수 있는 화법을 구사한 것입니다. 자하 보다 자장이 한 수 위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엇박의 화술입니다.     


  이를 두고 자하가 옳냐, 자장이 옳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목할 것은 공자가 제자들의 질문에 맞춤형으로 답을 줬다는 겁니다. 11편 ‘선진’ 제15장을 보면 공자가 자장과 자하를 직접 평한 대목이 나옵니다. 자장에 대해선 ‘지나치다(過)’하고 자하에 대해선 ‘미치지 못한다(不及)’고 밝혔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표현이 여기에서 연유했습니다. 오늘날의 해석에 따르면 지나친 자장보다 미치지 못하는 자하가 위라는 풀이가 되지만 논어에선 ‘업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자장은 자공만큼 두뇌회전이 빠르면서 자로처럼 저돌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판단이 빠르지만 이거다 싶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진하는 행동가형입니다. 자하는 배운 것을 천천히 음미하고 그걸 우회적으로 풀어내는 걸 좋아하는 문학지사(文學之士)의 기질이 농후합니다. 뜸을 한참 들인 뒤 입을 열고 행동하기에 앞서 온갖 전거를 찾아보는 학구형이기도 합니다. 자장이 직선이라면 자하는 곡선이고, 자장이 섬광처럼 번뜩인다면 자하는 아지랑이처럼 오묘합니다.     


  공자가 자장에게 말한 교우관은 그런 자장에게 맞춤형으로 일러준 것입니다. 머리가 워낙 좋다 보니 그 사람이 현명한가, 아닌가부터 따지는 자장에게 군자라면 모자라고 뒤처진 사람도 아끼고 가까이하라고 지침을 내린 것입니다. 자장은 그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 됐습니다. 반대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자하에겐 “가하면 사귀고 불가하면 멀리하라”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지침을 내려줬을 겁니다. 사실 공자의 관점은 이에 더 가깝습니다. 16편 ‘계씨’ 제4장에서 공자는 유익한 벗(益友)과 손해 보는 벗(損友)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벗을 사귐에 있어 너무 편벽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누군가 나의 벗이 되기를 청한다면 그가 아무리 모자란 사람이라도 품도록 하라. 하지만 사람됨이 비뚤거나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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