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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12. 2021

덕은 넓게, 도는 두텁게

19편 자장(子張) 제2장

  자장이 말했다. “덕을 붙잡았으나 넓히지 않고 도를 믿으나 두텁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子張曰: 執德不弘, 信道不篤, 焉能爲有, 焉能爲亡.

  자장왈  집덕불홍  신도불독  언능위유  언능위무          




  덕은 나의 내면에 더 많은 타인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엔 부모형제 같은 가족에서 시작해 친구와 연인, 이웃으로 확대되고 고을 사람, 나라 사람, 인류까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품을 넓히는 것이 덕입니다. 따라서 일단 덕을 갖추면 꾸준히 그걸 넓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는 내가 아닌 타자, 곧 만물과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형성되며 변화하다 소멸하는지에 대한 객관적 원리와 원칙이 도입니다. 따라서 도란 요즘 말로 자연과학적 원리에 가깝습니다.      

  

  다만 유가에선 인간 세상에도 그런 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사를 다루는 정치 역시 그런 객관적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 돼야 한다는 생각 생각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유가의 (대)도는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으로 정치에 가까웠습니다.     


  공자가 제창한 군자학이란 바로 주관적인 덕과 객관적인 도를 하나로 합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 윤리를 날줄로 삼고 집단적 정치를 씨줄로 삼아 조화롭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직조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 범주가 다른 그 둘을 연결시켜줄 키워드가 필요했으니 공자가 찾아낸 그 키워드가 바로 어짊이란 뜻의 ‘인(仁)’입니다. 공자에 의해 재규정된 인에는 개별적 인간 속에 감춰진 고귀한 내면(덕)과 세상의 객관적 이치에 부합하는 조화롭고 바람직한 정치(도)가 하나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인을 통해 수신제가의 덕과 치국평천하의 도가 하나로 꿰맞춰지게 된 것입니다. 공자에게 그 인을 다시 객관적 형식과 법칙으로 확립한 것이 예(禮)였습니다.  

    

  공자의 군자학에서 도와 덕은 두 개의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균형을 잃고 쓰러지게 됩니다. 공자의 직접 제자는 이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여(증자)-자사(공급)-맹자(맹가)로 이어지는 내성(內聖)파가 득세하면서 객관적 도보다 주관적 덕을 강조하면서 균형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객관적 원리에 가까웠던 도리가 도덕 원리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더불어 인의 객관적 형식과 법칙이던 예를 덕의 종속변수로 간주하게 됐습니다.     


  사실 전국시대 유가의 주류는 맹자 계열의 내성파가 아니라 순자(순황) 계열의 외왕(外王)파였습니다. 순자와 그의 제자로 법가 최대 이론가가 된 한비자의 분류로 봐도 효와 충을 강조한 맹자 같은 내성파보다는 인과 예를 강조한 자장과 자하, 자유, 순자 같은 외왕파의 세력이 더 컸습니다. 내성파가 맹자의 덕치(德治)를 강조한다면 외왕파는 공자의 예치(禮治)의 전통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원류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다 유교가 한대의 국가 사상이 되면서 충효를 앞세우는 보수화의 길을 걸으며 내성파 중심의 도덕주의 정치사상으로 쭈그러들고 만 것입니다. 급기야 송대의 성리학은 도와 덕을 등치화하면서 스스로를 도학(道學)으로 자처하며 내면의 윤리가 세계의 물리까지 지배한다는 관념론의 극치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자장이 말하는 도는 도덕 법칙에 가까운 도리가 아니라 물리법칙 아니면 심리 법칙에 가까운 도로 봐야 합니다. 또 도에 대한 믿음은 그러한 객관적 원칙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정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먼저 백성의 신뢰를 얻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안보적 불안을 해소해주는 것이 ‘좋은 정치’의 시발이라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왜 의로움은 말하지 않고 이로움만을 말하느냐”는 맹자의 '왕도(王道) 정치’나 주자의 '도학의 정치'와 전혀 궤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두텁게 해야 할 도는 윤리적 가치가 아니라 객관적 법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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