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장
자장이 말했다. “선비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제사를 모심에 공경을 생각하며, 상을 치를 때는 슬픔을 생각하나니, 그거면 충분하다.”
子張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자장왈 사견위치명 견득사의 제사경 상사애 기가이의
19편의 제목이 ‘자장’인 것은 그 서두에 자장의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자장 편은 모두 25 개장인데 모두 공자 제자들의 말로만 구성돼 있습니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순으로 자하, 자공, 자여(증자), 자장, 자유의 순입니다. 자공을 제외하곤 모두 공자보다 40세 이상 어린 자(子) 계열 제자입니다.
공자와 나이 차이가 33세 이하인 제(弟) 계열 제자 중에선 자공 한 명만 등장합니다. 자공은 제 계열 제자 중 공자보다 31세 연하로 가장 어린 축에 듭니다. 여기서 자공이 제 계열 제자와 자 계열 제자의 허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또 자공이 직접 학단을 꾸리진 않았지만 학단의 좌장이 된 자 계열 제자들의 후원자였을 가능성도 엿보게 됩니다.
19편의 제목에 등장하는 자장은 ‘리틀 자공’에 가깝습니다. 공자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핵심을 찌르는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그렇습니다. 윤리적 수제학(덕)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지만 정치적 치평학(도)에 대한 심층적 관심도 닮았습니다. 또 자의식이 강해 너무 튄다고 공자로부터 '과유불급‘이란 말을 듣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자장에게선 ‘리틀 자로’의 모습도 엿보입니다. 19장 제1장의 이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던져야 선비라 할 수 있다’는 말에서 자로의 강단과 결기 같은 게 느껴집니다. 조선시대 사육신이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의 ‘행동하는 양심’에 투영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의 생각은 이와 좀 달랐습니다. 공자는 의(義) 보다 인(仁)과 지(知)를 강조했습니다. 위태로운 것을 보고 불나방처럼 뛰어들기보다는 미연에 방지하거나 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논어’ 8편 ‘태백’ 제13장에서 ‘위방불입(危邦不入) 난방불거(亂邦不居)’라 하여 ‘위태로운 나라로 들어가지 않으며, 난이 일어난 나라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도 삼환의 실정이 극에 달하자 14년간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지식 행상에 나섰습니다.
자장은 여기서 4가지 상황을 얘기합니다. 후자인 제례와 상례는 공자가 강조한 예치(禮治)의 핵을 이루는 것으로 그 기본 마음가짐으로서 경(敬)과 애(哀)는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2가지가 남습니다. 견위(見危), 견득(見得)입니다. 위태로운 것을 봤을 때와 이득을 보는 상황입니다.
놀랍게도 공자는 자로에 대해 그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14편 ‘헌문’ 제12장에서 자로를 모델로 삼아 ‘완성된 인간(成人)’의 3가지 조건으로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을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로 자신이 직접 한 말이란 해석도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척살한 이후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유명한 문구이기도 합니다. 자장이 말한 견위치명, 견득사의와 앞뒤가 바뀌었을 뿐 동일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자장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자장은 친구를 사귐에 똑똑한지 아닌지를 구별하지 말고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낮은 자세로 겸손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또 유가에 걸맞게 제례와 상례에 있어서도 공경하는 마음과 슬픈 마음을 우선시해야 함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인간다움의 마지막 방점은 위험과 이익 앞에서 의리를 잊지 않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 보다는 맏사형이었던 자로가 목숨을 바쳐가며 솔선수범으로 지켜낸 가치였습니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루기 전까지만 해도 공작 학단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자장학파는 왜 흔적도 없이 몰락했을까요? 저는 이 글에서 그 단초를 찾습니다. 후대의 기록을 보면 자장학파가 의협심을 강조하는 협유(俠儒•의협심 강한 유학자)의 길을 개척하다가 학맥이 끊겼다는 대목이 엿보입니다. 혹자는 자장 편 제1장의 내용을 부풀려 적용한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한비자는 진시황과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 한비자가 살아있을 적에 여덟 개 유가 학파(八儒)의 첫머리로 꼽았던 자장 학파는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진시황이 중국 대륙 통일에 성공한 뒤 백성의 우민화 정책으로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법가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을 모두 불태우고 공자의 가르침을 전한 유학자 수백 명을 산채로 매장한 사건입니다.
그럼 어떤 유학자들이 매장됐을까요? 진시황의 전횡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유학자들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해야겠다며 직언을 펼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팔유 중에 어떤 유학자들이 그 선봉에 섰을까요? ‘견위치명, 견득사의’를 선비의 자격으로 가장 중시한 자장학파 아니었을까요? 또한 어떤 서적을 가장 집중적으로 불태웠을까요?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면 차라리 이 도끼로 내 목을 베라’는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정신으로 무장해 진시황의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을 자장 학파의 책들 아니었을까요?
자장 편에서 자장의 발언은 초반 3개장에서만 인용됩니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장은 5개장이나 됩니다. 자장 편에 등장하는 5명의 제자 중 가장 어린 자장이 서두부터 나오고, 또 다른 제자들의 집중 견제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존재감이 남다른 게 사실입니다. 그처럼 낭중지추의 존재였으니 유가가 최대 위기에 처했던 진시황 시대에도 집중적 탄압을 받았을 겁니다. 자장의 가르침에 충실한 제자였다면 초개처럼 목숨을 버렸을 것이고 두려워 그러지 못한 제자였다면 다른 학파로 갈아탔을 겁니다.
결국 자장 학파야말로 암흑 같은 시기 유가의 명성과 불꽃을 지켜내기 위해 불쏘시개 같은 존재가 됐을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자장 학파의 저술은 모조리 불타버리고 그 학맥조차 끊기는 치명상을 입게 되지 않았을까요? 반대로 그 과실을 수확한 이들은 ‘위방불입 난방불거’의 처세술로 살아남은 수제파였을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를 되뇌며 자로-자공-자장으로 이어지는 치평파의 흔적을 더욱 열심히 지워나가지 않았을까요? 유가가 가장 힘겨운 시기 유가의 명성을 지켜낸 존재가 자장 학파라는 수치심과 열등감까지 빡빡 씻어내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