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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17. 2021

공자가 쓴 정치적 시(詩)

18편 미자(微子) 제11장

주나라에 여덟 선비가 있었느니라. 백달 백괄 중돌 중홀 숙야 숙하 계수 계와이다.     


周有八士: 伯達 伯适 仲突 仲忽 叔夜 叔夏 季隨 季騧.

주유팔사   백달 백괄  중돌 중홀 숙야  숙하  계수 계와


          

  18편은 높은 덕과 비범한 재주를 갖췄지만 자신의 신념과 세상이 어긋나 몸을 감춘 일민(逸民)이나 스스로의 신념 때문에 속세와 연을 자발적으로 끊은 은자(隱者)가 주로 등장합니다. 일민은 군자지도를 펼치기 위해 ‘입세간(入世間)’의 뜻을 품었지만 공자가 말한 ‘위방불입(危邦不入) 난방불거(亂邦不居)’에 입각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긴 사람입니다. 반면 은자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라는 시인 백석의 마음으로 적극적 출세간(出世間)을 단행한 사람입니다. 전자가 유가(儒家)에서 외경한 선비라면 후자는 도가(道家)에서 이상화한 선비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주나라의 ‘마지막 선비’라 할 미자와 기자, 비간을 필두로 하는 일민을 기리고 칭송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혼탁한 세상을 바른 정치로 바꾸겠다는 공자의 고군분투를 부질없다 비판하는 은자를 설복하려 합니다. 물론 후자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런데 그게 묘한 감동을 줍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14년간 천하주유(天下周遊), 철환천리(轍環千里)를 펼쳤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세간으로부터 거부당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은자들을 설복하려는데 번번이 따돌림당하는 것은 그 대척점에 선 존재로부터도 거부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학문적 성취를 통해 이뤄지는 정치, 개인적 윤리와 집단적 통치가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꿈꿨던 공자는 그렇게 철저히 외면받고 버림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자는 탄식을 할지언정 결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이 아니더라도 제자들을 통해 그 물길을 열어가기를 소망했습니다. 인간 공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자는 도덕의 사표여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고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 같은 존재였기에 경탄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18편의 마지막 장인 13장에는 정체불명의 여덟 선비의 이름만 나열됩니다. 백(伯) 중(仲) 숙(叔) 계(係)는 중국에서 맏이, 둘째, 셋째, 넷째를 지칭하는 호칭입니다. 이름에 이 글자가 들어간 것은 형제 중에서 그의 위치를 말해줍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네 쌍둥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또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의 아들인 2대 성왕 때 선비들이다, 11대 선왕 때 선비들이다라는 출처 불명의 전언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준의 논어 관력 책자는 공자가 흠모했던 주나라 때 현인(賢人)이 많았음을 보여 준다 정도로만 풀이되고 넘어갑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제 눈에는 백(伯) 중(仲) 숙(叔) 계(係)라는 형제 서열 관계가 이름에 포함된 사람을 굳이 둘씩 거명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노나라 정치의 원흉으로 비판받은 삼환 역시 맹손(孟孫·원래는 仲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이라 하여 형제의 서열을 성씨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노환공의 자식들인데 적장자가 노환공의 뒤를 이은 노장공입니다. 백에 해당하는 인물이 노장공인 것입니다.

     

  노장공의 어머니는 배다른 오라비인 제양공과 불륜관계에 있던 문강이었습니다. 노장공의 아버지 노환공은 아내인 문강과 제양공의 불륜을 뒤늦게 눈치채고 조치를 취하려다가 제양공이 보낸 킬러에게 압살 됐습니다. 그로 인해 왕위를 물려받은 노장공은 어머니 등쌀에 아버지의 원수인 제양공의 딸과 정략결혼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노나라 백성의 민심을 살 수 없었고 결국 배다른 형제들을 중용하는 바람에 이후 300년간 노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자초한 인물입니다.     

  

  공자는 노장공 사후 100년 뒤 사람입니다. 당시 노나라의 실권은 여전히 삼환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고 노장공의 핏줄을 이어받은 노나라 제후는 허수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싫어 14년간 노나랄 떠나 천하를 주유했지만 별무소득 없이 다시 노나라에서 학당을 열어야 했던 공자로선 삼환을 대놓고 비판할 수 없었습니다. 삼환의 정치를 혁파하기 위해선 혁신의 주체로 필요한 노나라 제후는 더욱 비판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치란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는 것(政者正也)”이라고 외쳤던 공자가 어찌 그 문제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삼환의 정치를 비판하는 우회적 메시지를 계속 내보냈습니다. 18장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차마 대놓고 비판할 수 없었던 공자의 그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거기엔 삼환뿐 아니라 백(伯)에 해당하는 노장자 이후의 노나라 제후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결기가 느껴집니다.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현실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공자가 그토록 사랑했선 시 한 편의 값어치를 지닙니다.      

  

  어쩌면 원문에는 그 뒤의 내용까지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논어’ 편집을 주도한 자여(증자)학파와 유약(유자)학파는 모두 노나라에 남아 학당을 운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권력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저어됐을 겁니다. 비단 노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대 이후 유학이 국가이념이 되면서 충효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데 충성을 바쳐 마땅한 당대의 군주까지 비판한다는 것이 감당이 안됐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뒤의 내용은 다 날아가고 일종의 암호문처럼 첫 구절만 살아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공자가 말했다'는 자왈(子曰)이란 표현까지 빼가며.    

  

  제 상상이 맞다면 공자는 참으로 멋진 사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안동 김문의 권력이 60년을 갔다고 하는데 삼환의 권력은 300년이나 갔습니다.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공자가 그런 권문세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우환을 불러들인 노나라 종실까지 비판하고 나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굽쇼? 공자는 그런 말 한 적이 없습니다. 공자에게 충(忠)은 인물이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중시하는 내면의 가치에 충실하라는 뜻이었을뿐입니다. 공자를 그런 도그마 안에 가둬두지 못해 안달이 났던 후대의 유학자들이 안쓰럽고 좀스러워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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