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미자(微子) 제10장
주공이 노공에게 말했다. “군자는 친족을 풀어두지 않고, 대신들이 자신을 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게 만들지 않으며, 옛 친구는 큰 잘못이 없는 한 버리지 않고, 한 사람에게서 모든 것이 갖춰지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周公謂魯公曰: “君子, 不施其親, 不使大臣怨乎不以, 故舊無大故則不棄也, 無求備於一人.”
주공위노공왈 군자 불시기친 불사대신원호불이 고구무대고즉불기야 무구비어일인
주공(희단)은 주나라 시조인 문왕(희창)의 네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문왕은 아들만 10명 이상 낳았는데 그중 둘째인 무왕(희발)이 결국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로 천하를 통일합니다. 주공은 아버지와 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함에 있어 강태공 여상과 더불어 일등공신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종법제와 봉건제, 예악으로 대표되는 주나라 정치제도의 설계자로 불립니다. 그래서 그의 시호는 문공(文公)이었습니다. 유교 경전 13경 중 주역(周易)과 주례(周禮)를 주공이 쓴 것이라는 가설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형인 무왕이 주나라 창건 3년 뒤 승하하고 조카인 성왕(희송)이 십대 초반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맡아 내란을 진압하고 정치를 안정시킨 뒤 7년 뒤 성왕이 성인이 되자 모든 권력을 반환했습니다. 쉽게 말해 조선시대 조카인 단종의 섭정을 맡은 수양대군 같은 존재였는데 수양대군과 반대로 끝까지 조카의 왕위를 지켜준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은탕왕, 주무왕, 주문왕과 동급의 성인(聖人) 반열로 올려 추앙한 인물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자주 안 나타난다고 서운해 할 정도였습니다.
주공이 공자의 역할 모델이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주공이 봉작받은 제후국이 바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였습니다. 노나라는 주공이 설계한 주나라 예법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나라 운영 프로그램의 원천기술 보유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자는 주공의 정신적 후예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다만 주공은 성왕을 대신해 주나라를 통치해야 했기에 맏아들인 희백금을 노나라의 초대 제후로 삼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 자신은 섭정 기간 주공(周公)이 됐습니다. 주나라의 원래 근거지였던 기산 지역 제후로 봉해져서라는 추론과 주나라의 수도 호경 동쪽에 그가 세운 성주(成周·현재의 낙양)라는 도시의 제후로 봉해져서라는 추론이 엇갈립니다. 섭정에서 물러난 뒤엔 노나라로 가지 않고 성왕의 의심을 풀기 위해 초나라로 도피성 외유를 갔다 돌아와 성주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18편 10장의 내용은 주공이 자기 대신 맏아들 백금을 노나라의 제후인 노공으로 파견하면서 일종의 통치의 지침으로 제시한 말입니다. 노나라 사람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강령은 네 가지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친(親)에 대한 것으로 주자 이후 대부분 이를 일가 친족 곧 종친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대신(大臣)이니 대부 이상의 고위 관료를 다루는 것입니다. 셋째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에 대한 것입니다. 보통은 공신으로 풀이합니다. 넷째는 그들 모두를 포괄하는 일반적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자하가 말한 ‘가까운 일에서 생각한다’는 뜻의 근사(近思)의 방식으로 논리가 전개되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족부터 통치의 파트너로서 최측근, 오랜 세월 동고동락을 같이 한 전우들(위로는 공신부터 아래로는 병사들까지) 마지막으로 일반적 인간, 곧 백성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됩니다. 친족을 챙기고, 대신을 섭섭하게 하지 않으며 동지들은 큰 잘못이 없는 한 끝까지 챙기라,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완벽한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지 말라. 즉,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걸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인 不施其親입니다. 施는 ‘베풀 시’인데 수많은 논어 주석가들은 고대엔 시가 ‘느슨할 이(弛)’와 서로 호환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이는 곧 ‘버릴 기(棄)’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주장합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弛의 뜻을 그대로 살려 ‘친족을 느슨하게 풀어두지 않는다’로 새기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또한 施에도 ‘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不施其親은 ‘친족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친족을 버리지 않는다’보다는 ‘친족을 기용하지 않는다’ 내지 ‘친족을 풀어두지 않는다’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유교국가에선 종친을 고관대작에 기용하는 것을 기피했습니다. 종친의 힘이 커지면 왕권이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공자 시대 노나라의 고질적 문제 역시 삼환이라는 종친 세력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종친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새길 때 당대의 현실정치를 매섭게 비판하는 의미까지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는 20편 제1장에서 주무왕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주 왕실에 친족이 많다 한들 어진 사람만 못합니다(雖有周親 不如仁人)‘라고 밝힌 대목과도 호응합니다. 무왕의 메시지는 결국 ’종친보다는 어진 사람을 우대하라'는 것이므로 '종친을 버리지 않는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공의 메시지 또한 '종친이 기세등등하게 날뛰지 않도록 단속을 잘하라'는 취지로 새기는 게 적절합니다.
또한 만일 ‘종친을 버리지 않는다’로 새기게 되면 바로 뒤에 나오는 ‘대신들이 자신을 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게 만들지 않는다’와 충돌이 발생합니다. 유능한 대신을 놔두고 종친을 기용하게 되면 대신들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깃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공이 설계한 종법제 아래선 그 자손에게 봉작을 나눠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종법제에 따라 봉작을 부여하는 상황에서 다시 ‘종친을 버리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종친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지 말라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어울립니다.
공자는 함부로 직설적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심층적 의미가 없는 말 또한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논어에 이 구절이 실린 이유를 단순히 주공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바로 주공의 말을 빌려 삼환 정치의 문제점을 비판하려는 칼날이 감춰져 있기도 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 경우 弛가 됐건, 施가 됐건 ‘종친을 함부로 풀어놓지 말라’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섭니다.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이렇게 '논어' 안에서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