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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19. 2021

산산이 흩어진 예악이여

18편 미자(微子) 제9장

  악대장(대사) 지는 (북쪽) 제나라로 갔다. 아침담당 악장(아반) 간은 (남쪽) 초나라로 갔다. 점심담당 악장(삼반) 료는 (동남쪽) 채나라로 갔다. 저녁담당 악장(사반) 결은 (서쪽) 진(秦)나라로 갔다. 북 치는 숙은 하내(하난성 필양현)로 들어갔다. 소고를 흔드는 무는 한중(산시성 남부)으로 들어갔다. 악대장 조수 양(陽)과 경쇠 치던 양(襄)은 바다 건너 섬으로 들어갔다.

  

  大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鞀武入於漢, 少師陽, 擊磬襄入於海.     

  대사지적제   아반간적초   삼반료적채   사반결적진  고방숙입어하    파도무입어한   소사양  격경양입어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본문만 읽으면 당연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8명의 인물은 공자가 살던 노나라를 대표하는 악공(樂工)이었습니다. 정확히는 25대 제후인 노소공(재위 기원전 541~기원전 510년) 시절의 궁중 악공이었습니다.

       

  주나라에선 백성을 교화하는데 있어 엄숙한 의례(儀禮) 만큼이나 조화로운 음률로 이뤄진 음악을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국가행사뿐 아니라 왕이나 제후의 일상에서도 음악 연주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음악에는 춤이 따를 데도 많았는데 엄격한 종법제에 입각해 연주곡의 길이와 악단과 무용단의 숫자도 다 달라야했습니다. 의례가 질서를 상징한다면 음악은 조화를 대표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한 묶음으로 예악(禮樂)이라 부른 것입니다.  

     

  대사 또는 태사라는 직책은 궁중 악대의 총책임자입니다. 요즘 말로 마에스트로(상임지휘자)에 해당합니다. 아반, 삼반, 사반은 제후가 식사를 할 때 풍악 담당 악장을 말합니다. 주나라는 왕의 경우 하루 네 끼, 제후는 세끼를 먹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노나라 제후는 하루 세 차례 식사를 할 때 매 끼니 다른 풍악연주를 들었습니다. 매 끼니 담당 악장이 달랐습니다. 대략 아반은 조찬, 삼반은 점심, 사반은 저녁 담당으로 보면 됩니다. 다음으로 고방(鼓方)은 북연주자, 파도(播鞀)는 소고(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북) 연주자, 소사(少師)는 대사의 조수(부지휘자), 격경은 경쇠 연주자를 뜻합니다.            


  궁중 악단의 핵심적 인재인 이들이 다른 나라와 산간벽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니 특별한 임무라도 부여받았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노소공은 노나라 정치를 전횡하던 삼환을 제거하기 위한 역(逆)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북쪽으로 이웃한 강대국 제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노나라에선 7년간 제후가 공석인 상태에서 계평자를 중심으로 삼환이 노나라를 직접 통치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런 비정상적 상황은 결국 노소공이 망명지에서 병사하자 삼환이 노소공의 동생인 노정공을 제후로 옹립하면서 삼환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노나라 최고의 악공 8명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바로 이런 준(準)내전 상황의 산물이었습니다. 주군으로 모시던 노소공이 장기 부재중인데 그렇다고 차마 주군을 몰아낸 계손, 숙손, 맹손 씨 휘하 악단에 의탁할 수도 없었기에 각자도생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악공의 자존심 상 자신들의 등급을 스스로 떨어뜨릴 수 없는 데다 대의명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논어의 주석서는 이를 두고 8명 악공의 지혜로운 처세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는 구절이라고 설명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노나라는 주나라 예약의 창시자인 주공의 봉지였습니다. 그래서 주공이 설계한 예악의 원형을 보존해왔다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악의 핵심 인재가 뿔뿔이 흩어졌다는 건 곧 노나라의 정체성이 통째로 무너졌다는 소리입니다. 노소공의 실정과 삼환의 횡포로 주공이 창안하고 설계한 성인지도(聖人之道)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는 통렬한 현실비판인 것입니다.          


  10장이 주공과 노공의 옛이야기를 빌려서 현실을 풍자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비판’이라면 9장은 당대에 벌어진 일을 담담히 진술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9장에는 또 다른 함의도 담겨있습니다.           


  8명의 악공 중 ‘격경 양’은 ‘공자가어’에서 공자에게 거문고를 가르친 사양자(師襄子)와 동일인입니다. 옥으로 된 타악기 경쇠 연주자이지만 거문고 연주에도 일가를 이룬 악공이었던 그는 공자에게 거문고 곡을 하나 가르친 뒤 연주 실력이 출중하니 다른 곡으로 넘어갈 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공자는 “아직 멀었다”며 번번이 사양하며 연습에 연습을 더하다니 문득 “문왕(주문왕)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를 들은 사양자는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읍하며 말합니다. “선생은 성인이 분명합니다. 그 곡은 문왕의 덕을 칭송한 ‘문왕조(文王操)’라는 곡입니다,” ‘사양자에게서 거문고를 배우다’라는 뜻의 학금사양(學琴師襄)의 일화입니다.    


  주나라 예약의 정통 계승자였던 사양자를 비롯한 여덟 명의 악공이 노나라를 떠나갔습니다. 그럼 그 노나라 예악의 정수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고스란히 전수받고 성인이 반열에 올랐다고 인정받은 공자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9편 ‘자한’ 제5장에서 공자는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문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의 정수가 내게 있는데 하늘이 설마 나를 죽여 ‘이 문화(斯文)’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둘 것인가”라고 외칩니다. 노나라에 온축 돼 전해온 주나라 문명 질서를 터득한 이는 그 자신 하나뿐이라는 강렬한 자의식 선언입니다. 18편 9장은 그와 달리 담담하게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주공이 완성한 주나라 예악의 고갱이가 오로지 공자 자신에게만 남겨져 있다는 선명한 자의식이 숨겨져 있습니다. 진실로 야심 찬 술이부작의 선언이 아닐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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