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3일(맑지만 미세먼지 여전히 심각)
‘윤석열의 난’이 처음 벌어졌을 때 비판하던 사람들 중에 “윤석열도 싫지만 이재명도 싫어”라는 양비론에 경도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내가 중도고 중용이야’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라고 우민은 생각했다.
우민도 ‘논어’를 읽다가 깨달은 것인지만 중용(中庸)은 단순히 양 극단을 배제하고 가운데를 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中)은 ‘가운데’ 보다는 ‘알맞다’로, 용(庸)은 ‘평범함’으로 새길 때 그 뜻이 더 명확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상을 운위함에 있어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알맞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해 가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가 중용이다. 평상심의 지혜로 난국을 풀어감에 있어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최선의 선택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고정된 과녁의 정중앙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과녁을 쫓아가며 적중시키는 것이 진짜 중용 아닐까?
'윤석열의 난'은 주권자의 권한 대행자에 불과한 대통령이 주권자 대다수가 동의할 수 없는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주권자의 총의로 구성된 국회를 무력으로 마비시키고, 국가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한 것이다. 주권자의 관점에서 보면 쿠데타이자 내란일 수밖에 없다.
이 발등의 불부터 끄는 것이 현 시국에서 평상심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 아닐까? 그럼 그 대척점에 선 야당 대표의 잘못은 없을까? 그에 대해선 이미 여러 건의 재판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이다. 그 재판 결과를 기다려 그때 다시 중용의 지혜를 발휘해도 늦지 않다.
윤석열은 그걸 기다릴 수 없다며 무리수이자 자충수를 둔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여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 자신과 아내의 허물을 덮으려는 불안과 조급증의 산물일 것이다. 그걸 뻔히 들여다보고 있는 국민이 지금 시점에 양비론을 펼치는 것은 그런 윤석열의 작태에 부화뇌동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민의 판단이다.
현행범인 윤석열과 재판 중인 이재명을 자꾸 동일 잣대에 세우려는 심리를 차기 대선을 내다본 장기적 관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민이 보기에 그것은 ‘권력의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불안과 조급증에 휘둘리는 것이란 점에서 윤석열의 성급한 선택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장기적 관점의 심모원려가 필요하다면 왜 그토록 많은 대통령들이 감옥을 가거나 불행한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그 불길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면 이제는 그 시스템을 고쳐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중용 아닐까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뿐 아니라 1987년 체제 성립 이후에도 그 많은 소를 잃고도 여전히 외양간 고칠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을 과연 중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