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소아 Feb 24. 2021

공자의 보검, 자로

18편 미자(微子) 제7장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다가 뒤쳐졌다. 노인을 만났는데 지팡이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우리 스승님을 보시지 못했습니까?” “사지를 움직여 일 할 줄도 모르고, 오곡도 구분할 줄 모르는 자가 무슨 스승이란 말인가?” 그러고선 지팡이를 땅에 꼽고 김을 메기 시작했다.

  자로는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서있었다. 노인은 그런 자로를 만류하고 집으로 데려가서 하룻밤 재워주며 닭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고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다음날 자로가 공자를 따라와 이를 전했다. 공자는 “은자로다” 하면서 자로에게 되돌아가서 다시 만나고 오라고 했다. 자로가 그 집에 가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자로가 말했다. “출사를 마다하는 것은 의리가 없는 것이다.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이를 공경하는 예절은 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신 간의 의리 또한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 깨끗이 하고자 나라의 큰 윤리를 어지럽힌 격 아닌가. 군자가 관직에 진출함은 의무의 실천이다. 이미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안다 하더라도.”   

  

  子路從而後, 遇丈人, 以杖荷蓧. 

  자로종이후   우장인  이장하조

  子路問曰: “子見夫子乎?” 

  자로문왈    자견부자호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장인왈   사체불근  오곡불분  숙위부자    식기장이운

  子路拱而立. 止子路宿, 殺鷄爲黍而食之, 見其二子焉. 

  자로공이립   지자로숙  살계위서이사지    현기이자언

  明日, 子路行以告.  

  명일  자로행이고 

  子曰: “隱者也.” 使子路反見之. 至則行矣.

  자왈   은자야    사자로반견지   지즉행의

  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潔其身, 而亂大倫. 

  자로왈   불사무의   장유지절   불가폐야   군신지의   여지하기폐지    욕결기신  이란대륜

  君子之仕也, 行其義也. 道之不行, 已知之矣.“ 

  군자지사야   행기의야  도지불행   이지지의


  드디어 공문의 대사형인 자로(子路)가 등장합니다. 공자와 같은 노나라 사람으로 본명이 중유(仲由)이고 자가 자로 또는 계로(季路)입니다. 성씨가 없는 걸로 봐서 한미한 집안 출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보다 아홉 살 어렸으니 제(弟) 유형의 제자군에서도 염경(염백우·염씨네 3형제 중 맏이), 증점(자여의 아버지)과 더불어 나이가 가장 많았습니다. 공자가 학당을 열고 얼마 안 돼 제자가 됐으며 공자가 중년 이후 천하를 유랑할 때 그 마차를 직접 몰았을 정도이니 공자가 가장 믿고 의지한 제자였다는 점에서 예수의 제자 중 베드로에 비견할만한 인물입니다.      


 저는 공자를 ‘덩치 큰 돈키호테’라고 부르는데 공자의 3000 제자 중 산초 판자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자로일 것입니다. 그만큼 공자와 밀착돼 서로 격의 없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습니다. 어떤 조직에서나 조직의 수장이 다른 조직원들의 본보기를 삼기 위해 공식석상에서도 거침없이 혼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만큼 둘 사이에 깊은 신뢰관계가 형성됐을 때 가능한 일인데 공자에게 그런 존재가 바로 자로였습니다.          


 공자 제자 중에 자공이 지혜(智), 안회가 인품(德)을 대표한다면 자공은 담대함(勇)의 상징입니다. 실제 용력도 대단해 일찍부터 공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자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자공은 그보단 의리(義)의 화신입니다.          


  ‘공자가어’의 기록을 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깨나 쓰는 건달로 살던 자로가 공자학당을 급습하듯 찾아간 장면이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공자의 아버지가 천하장사로 유명했고 공자 또한 키가 2m 가까이 되는 거구였습니다. 또 공자가 가르친 과목 중 마차 몰기와 활쏘기가 있었으니 자기와 비슷한 한량이라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싸움꾼의 불량한 옷차림에 긴 칼을 차고 막 잡은 닭과 새끼돼지를 들쳐 매고 나타나 싸움을 걸려는 자로에게 공자가 ‘선빵’을 날립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건 뭔가?”

 “장검을 좋아한다.”

 “어떤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거다.”

 “개뼈다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학문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간언을 들어야 착해진다. 무엇이든 바로잡고 갈고닦아야 재목으로 쓰이는 것이다. 배우고 묻기(학문)를 소중히 여긴다면 누구인들 나쁜 길로 빠지겠는가. 만일 어진 이를 헐뜯고 선비를 미워한다면 필시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배우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산의 대나무는 휘지 않고 스스로 곧으니, 이것을 그냥 잘라다가 화살로 쓰면 쇠가죽도 뚫을 수 있다. 천성이 뛰어난 자에게 무슨 배우고 묻기가 필요하겠는가?”

  “그 화살 한쪽에다 꿩의 깃털을 붙여 깃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다 쇠를 붙여다가 촉을 만들면 단지 쇠가죽을 뚫음에 그치겠는가?”          


  이렇게 서로의 내공을 삼합 가량 겨누고 난 뒤 번개를 맞은 듯 깨달음은 얻은 자로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후대 무공고수의 내공 대결이나 불가의 법거량(法擧量)을 연상시킵니다. 그렇게 공자를 형님, 아니 스승으로 삼은 자로는 이후 한결같은 자세로 공자를 섬깁니다. 물론 가끔 공자의 노선에 이의도 제기하고 공자의 꾸지람에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자세를 관철하여 수많은 제자의 모범이 됩니다.           


  총명함은 부족했지만 우직함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특히 말년에 자공의 고국인 위(衛)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반란이 일어나자 홀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맞습니다. 그 최후의 순간에도 공자의 가르침을 쫓아 “군자는 죽을 때에도 의관을 바로 해야 한다”며 비뚤어진 갓을 바로 쓰고 칼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가 처음 공자를 만났을 때 불량한 옷차림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어찌 감동적 모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가르침이 천하의 불량배였던 인물을 의에 죽고 사는 군자로 환골탈태시켰으니 자로야말로 공자 가르침에 대한 믿음의 반석(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요 군자학의 시금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는 자로의 시체가 젓갈로 담겨 노나라로 돌아오자 집안의 젓갈을 다 갖다 버리고 죽기전까지 젓갈이라면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또한 자로가 내 제자가 된 뒤에나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라며 그 빈자리를 안타까워했다고 하지요그 상실감이 너무 컸던 걸까요자로가 죽고 4개월여 만에 공자 역시 숨을 거둡니다.         


  이런 자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장은 후대에 이야기체로 집필된 ‘장자’의 구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장자였다면 마지막 멘트의 주인공은 자로가 아니라 행방을 감춘 은자였겠지만.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은자가 아니라 자로입니다. 자로는 말로써 공자를 비판한 은자를 묵묵한 행동으로 감읍시켰기 때문입니다.

           

  구체적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은자와 자로 간에는 치열한 법거량이 펼쳐진 셈입니다. 은자들은 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 도를 되찾겠다고 몸부림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분투를 가소롭게 여깁니다. 어차피 안 될 일이란 거죠. 하지만 공자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을 온몸으로 웅변합니다.  

         

  자로는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스승을 조롱하고 비웃는 노인 앞에서 더욱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합니다. 노인은 그런 자로의 충직한 모습에 감동해 집으로 데려가 숙식을 제공할 뿐 아니라 자식들까지 소개합니다. 예의니 도덕이니 하는 게 부질없다고 했던 은자였음에도 자로의 진실한 처신 앞에서 역시 인간다움 예의로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자로가 다시 찾아갔을 때 은자가 행방을 감춘 이유는 뭘까요? 인의니 예의니 하는 것들이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 조롱했는데 그것이 새삼 그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 있음을 발견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알면서도 관직을 맡아 세상을 바꾸려는 공자의 분투를 손가락질하고 비웃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였을까요? 

          

  자로야말로 공자의 살아있는 보검이었습니다. 그냥 놔뒀으면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치고 다녔을 인물을 갈고 다듬어 예의와 의리를 알고 심지어 거문고까지 탈 줄 아는 문무겸전의 군자로 빚어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꿈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사람들에게 자로를 보내는 것 자체가 예리한 보검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 

     

  힘이나 쓸 줄 알지 예악이나 법도에 대해 뭘 알랴했던 사람들에게 강직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추고 공손함 속에 힘을 감춘 자로야말로 한쪽에 꿩의 깃털이 달리고 다른 한쪽에 쇠촉이 달린 화살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던 겁니다. 은자가 많이 나오는 18편에서 유독 자로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사진은 중국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에 걸린 자로의 초상입니다. 그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살았기에 당나라 현종 때에 '위후(衛侯)'로 봉해졌다가 송나라 도종 때에는 '위공(衛公)'으로 한 등급 더 높게 추봉됐습니다. 그래서 위공(衛公)이고 중유(仲由)는 명(名), 자로(子路)는 자(字)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자의 대단한 자의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