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미자(微子) 제6장
장저와 걸닉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에게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게 했다. 장저가 말했다. “저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자로가 말했다: “공구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정말 노나라의 공구가 맞소?” 자로가 말했다. “맞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알겠구먼.”
자로가 걸닉에게 물으니 걸닉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요?” 자로가 말했다 “중유라고 합니다.” 걸닉이 말했다. “정말 노나라 공구의 제자가 맞소?” 자로가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걸닉이 말했다.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온 천하를 휩쓸고 있는데, 누구에 의해 그 흐름이 바뀌겠소? 또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선 씨 뿌리고 흙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와서 이를 고했다. 공자가 낙심해 말했다: “사람이 날짐승 길짐승과 무리 지어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 공구가 나서서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장저걸닉우이경 공자과지 사자로문진언 장저왈 부집여자위수 자로왈 위공구 왈 시노공구여 왈 시야 왈 시지진의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 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其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문어걸닉 걸닉왈 자위수 왈 위중유 왈 시노공구지도여 대왈 연 왈 도도자, 천하개시야 이수이역지 차이여기종피인지사야 기약종피세지사재 우이불철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자로행이고 부자무연왈 조수불가여동군 오비사인지도여이수여 천하유도 구불여역야
18편에 나오는 은자는 주로 장강 이남의 초나라 사람으로 추론됩니다. 중원에 살던 사람 중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남쪽으로 몸을 숨겨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초나라에는 훗날 도가로 분류되는 선비가 많았습니다. 도가의 창시자로 꼽히는 노자(노담 또는 이이)도 초나라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6장에 등장하는 장저와 걸닉도 초나라의 그런 은자로 실제 이름이 아니라 그 외형을 보고 붙인 이름으로 보입니다. 장저는 키가 크고 진흙에 젖어있다는 뜻이고 걸닉은 걸출한 외모를 지녔지만 진흙탕에라도 빠진 듯 후줄근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공자는 그들을 보고 은자임을 알고 역시 자신의 보검인 자로를 보내 일종의 법거량을 시도합니다.
장저는 수레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이 공자라는 말을 듣자 “그렇다면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알겠네”라고 말합니다. 이는 공자가 세상의 이치(道)를 아는 사람인데 왜 길(道)을 묻느냐는 희롱 섞인 답변입니다. 걸닉은 공자가 아니라 자로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상이 혼탁한 물살에 휩쓸려가고 있는데 누군들 그 물길을 바꿀 수 있겠느냐며 공자를 따르기보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겠느냐고 일종의 스카웃 제의를 한 겁니다.
여기서 ‘피인지사(辟人之士)’와 ‘피세지사(辟世之士)’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전자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 후자는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뜻합니다. 장저와 걸닉 같은 은자가 스스로를 피세지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속세에 남아 세상을 구하겠다는 공자를 왜 피인지사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이는 고도의 풍자입니다. 공자가 세상 사람들을 구하겠다지만 정작 사람이 무서워 피해 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하지 않느냐고 놀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14년간 천하주유 기간 서너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초나라로 건너오기 전 위(衛) 진(陳) 채(菜) 송(宋) 4개국을 떠돌 당시 공자를 미워한 이들 나라의 대부들이 보낸 군사에 쫓기거나 송나라 백성에게 못된 짓을 했던 노나라 출신 권세가 양호로 오인돼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걸닉은 이를 환기시키면서 사람이 무서워 피해 다니는 주제에 세상을 어찌 구하겠다는 거냐고 조롱한 것입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무연(憮然)했다고 합니다. 낙심해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잠시 후 예리한 반론을 펼칩니다. 장저와 걸닉을 금수와 어울려 살겠다는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하면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천하의 도가 이지러졌다고 저마다 세상을 등진다면 구원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를 묻습니다. "설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사람들의 힘을 모아 물길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세상을 등지는 것보다 좀 더 인간다운 게 아닐까? 아무도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기에 내가 나서려는 것일 뿐이다."
공자의 위대함이 극명히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은자의 눈에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처세를 중시하는 장저와 걸닉 같은 은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숭고한 희생정신입니다. 그들의 사상을 온축한 도가의 표현을 빌리면 ‘대우(大愚)는 대지(大智)와 통한다’에 해당하는 통찰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의 20세기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늘 시도했다. 늘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너 낫게 실패하라(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메시지와 뜨겁게 공명합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공자의 시도는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심지어 공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과 그걸 이어받은 제자들의 시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들 역시 실패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중 몇몇은 실패할지언정 더 낫게 실패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