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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22. 2021

공자의 대단한 자의식

18편 미자(微子) 제8장

  일민으로 백이와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이 있다. 

  공자가 말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는 백이와 숙제라 할 것이다.“ 

  유하혜와 소련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의리에 맞았고 행실이 생각과 일치했으니 그런 점에서 괜찮았다.“ 

  우중과 이일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숨어살면서 말까지 버렸으나 몸가짐이 깨끗했고, 출사길을 포기했지만 또 다른 출사길을 뚫었다.” 

  “나는 이와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      


  逸民: 伯夷, 叔齊, 虞仲, 夷逸, 朱張, 柳下惠, 少連.  

  일민  백이  숙제  우중   이일  주장  유하혜  소련

  子曰: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齊與!” 

  자왈   불강기지 불욕기신  백이숙제여

  謂: “柳下惠, 少連, 降志辱身矣. 言中倫, 行中慮, 其斯而已矣.”

  위  유하혜  소련  강지욕신의  언중륜 행중려  기사이이의 

  謂: “虞仲, 夷逸, 隱居放言. 身中清, 廢中權." 

  위:  우중  이일 은거방언  신중청  폐중권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아즉이어시   무가무불가


               

  일민(逸民)은 높은 덕과 비범한 재주를 갖췄지만 자신의 신념과 세상이 어긋나 벼슬길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선비를 말합니다. 여기서 선비 사(士)를 쓰지 않고 백성 민(民)을 쓴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직을 맡지 않고 평범한 백성으로 돌아간 사람이란 함의가 담겼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평범한 백성이라도 공직으로 진출하면 선비(士)가 될 수 있다는 소리이니 의미심장할 수밖에요. 공자는 여기서 7명의 일민을 거론합니다. 

   

  첫째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때 제후국이던 고죽국의 왕자였습니다. 같은 은나라 속국이던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폐하고 천하를 차지하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쳤다 하여 주나라의 봉직을 받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곡기를 거부해 굶어 죽었다는 전설적 형제입니다. 공자는 그 형제에 대해 신념을 지키고 처신을 바로 했다고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둘째 우중과 이일입니다. 우중에 대해선 주무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주태왕)의 둘째 아들 중옹(仲雍)과 동일인이란 주장과 중옹의 손자라는 주장이 엇갈립니다. 중옹은 아버지가 막내 계력(季歷·주무왕의 할아버지)에게 제후의 자리를 넘겼으면 하는 걸 알고 그 뜻을 이뤄주기 위해 맏형인 태백(泰伯)과 함께 주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오(吳)나라를 세웠다는 인물입니다. 당시 중국 장강 남쪽에 있던 초 오 월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성행했는데 중옹은 그들과 동화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문신을 새겼습니다. 그 손자인 우중은 우(虞)나라 초대 제후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공자가 그 둘을 혼동했을 수 있는데 문맥상 중옹을 지칭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일이란 인물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주장 역시 행적이 묘연합니다. 심지어 7명 중 한 명으로 이름만 거론될 뿐 공자의 인물평조차 없어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류하혜와 더불어 언급되는 소련은 ‘예기’에서 동이(東夷)의 자손으로 부모상을 3년상으로 잘 치렀다고 공자의 칭송을 받은 소련과 대련 형제 중 전자와 이름이 같다는 것 외엔 역시 행적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 내용은 3일간 음식을 삼가고(三日不殆), 3개월간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올리며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며(三月不解), 1년 동안 슬픔을 표출하고(期悲哀), 3년 동안 웃지 않았다(三年憂)이니 공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3년상의 역할 모델이었다는 점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유하혜는 상대적으로 기록이 풍부한 인물입니다. ‘논어’에도 두 차례나 등장하는데 모두 공자로부터 상찬을 들었습니다. 또 200년 뒤의 ‘맹자’에서도 맹자가 이윤(은나라 탕왕의 재상), 백이 그리고 공자와 더불어 4명의 성인(聖人)으로 꼽은 인물입니다. 공자보다 150여 년 전 인물로 주공의 5대손인 노효공의 후손으로 노나라 대부를 지낸 인물입니다.      

  

  공자와 달리 뼈대 있는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옥리(獄吏) 또는 재판관에 해당하는 사사(士師)라는 낮은 지위의 벼슬을 맡았다가 세 번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노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벼슬을 구하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곧은 도리로 남을 섬기면 어디를 간들 쫓겨나지 않을 것이며, 도를 굽혀 남을 섬길 바에야 하필 부모님의 나라를 떠나겠느냐”고 답했다고 합니다. 또 나라의 도가 서있지 않을 때 벼슬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을 듣고선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다. 당신이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한들 당신이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느냐”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되 금도를 지킬 줄 알아 현인(賢人)으로 불린 인물입니다.     

  

  군자는 좋은 정치, 어진 정치를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벼슬길에 나서는 것(出仕)이 그의 본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형세와 자신의 신념이 부합하지 않을 때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초야에 묻혀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군자를 공자는 일민(逸民)으로 호명하고 있습니다.     

  

  그 케이스는 셋으로 분류됩니다. 백이와 숙제처럼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고고함을 지킨 일민이 있는가 하면 유하혜처럼 어진 정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흙탕물에 바짓가랑이를 적실지언정 일단 뛰어들어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한 일민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중(중옹)처럼 그 뜻을 펼치기 위해 고국을 떠나고 그 말을 버리되 다른 곳에서 그 뜻을 이루는 일민이 있습니다.      

  

  기존의 논어 해설서들은 백이와 숙제가 첫째이고 유하혜가 둘째, 우중이 셋째라는 서열의식을 드러냅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지킨 백이·숙제가 으뜸이고, 몸에 오물이 묻긴 했지만 마음만은 지킨 유하혜가 버금이고, 몸과 말까지 더럽혀졌지만 그래도 융통성 있게 대처한 중옹이 세 번째라는 것이지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공자는 말년까지 끊임없이 출사의 길을 모색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일민(逸民)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일민을 세 갈래로 분류해보고 자신은 그 셋 중 어디에 속한다고 해야 하나 저울질을 해본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첫째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를 실천했던 백이·숙제였습니다. 사실 공자가 그들을 높이 쳐주긴 했지만 공자의 군자학에 비춰볼 때는 그리 바람직한 모델이 아닙니다. 제후의 지위를 양보했다는 점에서 요순의 선위의 전통 아래 있는 선비이긴 하나 공자가 경계한 도가적 은자(隱者)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공자와 같은 노나라에서 세 차례나 벼슬길에 나섰지만 세 차례 모두 해직된 유하혜입니다. 유하혜는 비록 상경의 반열에 오르진 못했지만 신망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다른 나라로 가서 웅지를 펼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부모의 나라를 지키겠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공자 역시 노나라에서 읍재(邑宰)와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맡았으나 그 뜻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야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유하혜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뜻을 펼치기 위해 다른 나라를 떠돌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모국에서 그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아예 언어와 풍속이 다른 땅으로 가서 아예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 뜻을 펼친 중옹입니다. 대개 중옹에 대한 공자의 평을 “숨어 살면서 함부로 지껄였으나 몸가짐이 깨끗했고, 벼슬길에서 물러남에 융통성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중옹의 사례를 봤을 때 방언(放言)은 ‘함부로 지껄였다’기 보다는 ‘자신이 배웠던 언어를 포기했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당시 장강 이남은 남만이라 하여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며 중옹은 그들과 동화되기 위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까지 새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를 적극 실천한 것을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또 ‘폐중권(廢中權)’을 ‘벼슬을 그만둘 때 융통성이 있었다’고 새기는 것은 후대의 사대부 관점에서 해석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보다는 ‘군자로서 벼슬길을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벼슬길을 개척했다’고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공자 역시 노나라에서 더 이상 뜻을 별칠 수 없게 되자 다른 나라를 떠돌며 새로운 벼슬길을 개척하고자 했습니다만 그 역시 실패했습니다. 중옹의 길을 모색했지만 그 역시 실패한 것이지요.     

  

  마지막 공자의 발언은 바로 그런 자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나는 앞의 세 케이스에 모두 해당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론 유하혜의 케이스에 가깝지만 유하혜가 타의로 사직해야 했던 것과 달리 공자는 스스로 그만뒀다는 것입니다. 또 노나라만 고집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도 뜻을 펼칠 기회를 찾았지만 그렇다고 주나라의 제도와 말을 버리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다른 일민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뜻이니 실로 대단한 자의식의 표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림 속 두 인물은 백이와 숙제의 상상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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