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미자(微子) 제4장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에) 미녀로 이뤄진 가무단을 선사했다. 계환자가 이를 받아들이고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자 공자가 (노나라를) 떠났다.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제인귀여악 계환자수지 삼일부조 공자행
짧은 글로 이뤄진 장이지만 공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당시 노나라 최고 위정자가 미색에 혹한 것을 보고 실망해 천하주유에 나섰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이 짧은 문장에 공자가 노나라 정치에 본격 참여한 5년간의 흥망성쇠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토록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공자가 왜 노나라를 떠나 14년의 천하주유를 펼쳐야 했는지 그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공자는 그가 지천명이라고 말한 50세 즈음에 출사(出仕)의 꿈을 이룹니다. 삼환 중 공자의 제자가 된 맹의자(중손하기)와 남궁경숙(중손멸)을 배출한 맹손씨 가문의 추천으로 중도(中都)라는 고을의 읍재(邑宰·고을 원님)가 됩니다. 당시 노나라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계손씨는 동쪽의 비읍(鄪邑), 숙손씨는 서북쪽의 후읍(郈邑), 맹손씨는 북쪽의 성읍(郕邑)을 중심으로 각자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노나라 제후는 노나라 수도인 곡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직영지를 다스렸는데 중도는 그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숙량흘)이 추읍(郰邑)의 읍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비슷한 위치의 관직을 맡은 셈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 편에 따르면 공자는 역량을 인정받아 그 1년 뒤 사공(司空)이 됐다가 다시 대사구(大司寇)의 직책을 맡았다고 돼 있습니다. 사공은 토목공사를 관장하는 최고책임자이고 대사구는 형옥을 관장하는 최고책임자입니다.
주나라 제후국의 관직은 부총리 이상급의 경상(卿相)-장관급의 상대부-차관급 이하의 하대부로 나뉩니다. 공자가 속한 사(士) 계급은 오늘날 서기관 이하에 해당하는 관직을 맡았습니다. 읍재가 서기관급이라면 사공은 그보다 위인 차관급의 하대부였고, 법무장관급에 해당하는 대사구는 상대부에 해당합니다.
공자는 상대부 반열엔 못 오르고 하대부 정도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직책은 노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직위가 아니라 제후의 직영지 소속 사공과 사구에 불과했다는 게 중론입니다. 당시 대사구의 직위는 노나라 종실의 방계인 장(臧)씨 가문의 종주가 맡아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후대사람들이 공자에 대한 존경심에 그 직위를 자꾸 부풀렸다는 겁니다.
그즈음 공자는 이웃한 강대국 제나라의 제경공과 노나라 노정공 간 화평회담이 열린 ‘협곡회동’에서 외교의례를 관장하는 상례(相禮)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예의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제나라 군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예약의 본고장’으로서 노나라의 위상을 드높입니다.
그 활약으로 공자는 노정공과 당시 최고 실력자인 계환자(본명 계손사·季孫斯)의 신임을 얻어 상대부 반열에 오를 호기를 맞습니다. 이때 공자는 삼환정치를 무너뜨릴 비책을 실행에 옮깁니다. 노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의례에 걸맞은 정치의 회복을 표방하면서 삼환의 근거지인 비읍, 후읍, 성읍의 성벽을 허물게 하는 소위 ‘삼도도괴(三都倒壞)’를 추진한 겁니다.
공자는 노정공에게 “대부는 1백치(雉·옛날 성벽의 면적을 세는 단위로 높이 3장, 길이 1장의 면적이 1치에 해당) 이상의 성벽을 쌓으면 안 된다”는 예법을 내세워 삼도의 성벽을 허물 것을 건의합니다. 이와 함께 자신의 보검인 자로를 계손씨 가문의 가재(家宰·가문의 일을 총괄하는 비서실장)로 들여보내 이에 호응하게 만듭니다.
삼환은 이것이 자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임을 눈치 채지 못해 먼저 숙손씨가 후읍의 성벽을 허물고 계손씨도 우여곡절 끝에 비읍의 성벽을 허뭅니다. 비책의 3분의 2가 달성된 셈입니다. 그러나 동북방의 강대국 제나라와 국경을 접한 맹손씨의 성읍이 성벽을 허무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면서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삼환도 이 즈음 공자의 비책을 눈치채면서 자로가 해임되고 공자의 조정 내 입지도 위축되게 됩니다.
마침 그때 제나라에서 재색을 겸비한 80명의 미녀로 구성된 여성 가무단과 악기를, 화려하게 치장된 120 필의 말과 함께 화평의 선물로 노나라에 보냅니다. 이는 공자에게 비수를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공자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제나라 예약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인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당시 남성이 맡던 악공까지 여성으로 이뤄진 가무단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정통 예약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공자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다름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나라 최고 실권자인 계환자가 이를 냉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 여악에 홀딱 빠져 3일이나 조회를 개최하지 않았으니 공개적으로 공자 망신주기에 동참한 셈입니다. 아마도 삼도도괴의 계략을 뒤늦게 눈치채고 공자가 주창한 예치(禮治)를 대놓고 조롱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공자로선 뺨을 맞은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낄만한 조치였습니다.
공자세가에 따르면 우직한 자로가 ‘노나라를 떠날 때가 됐다’고 말했지만 공자는 그래도 미련이 남아 노정공이 직접 참여하는 제천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자고 합니다. 계환자로부터 공개적 모욕을 받긴 했지만 자신을 직접 기용한 노정공마저 자신을 저버리진 않았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천행사가 끝나고 대부들에게 나눠주는 제사음식이 공자에겐 돌아오지 않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음을 알고 노나라를 떠나게 됩니다.
스스로 천명을 아는 나이(지천명)가 됐다며 야심차게 정치에 뛰어들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입신양명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회심의 계책이 수포로 돌아가고 치욕스럽게 고향을 등지게 된 겁니다. 당연히 뒤통수가 뜨거웠을 것이고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악에 바쳐 ‘내 어떻게든 출세해 금의환향하리라’라고 결의를 다졌을까요? 아니면 절망감에 남몰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되뇌었을까요?
이 대목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미인계에 걸려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지독한 상실감과 수치심을 안은 채 만리타향을 떠돌게 된 사내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 공자의 진면목이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