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미자(微子) 제3장
제경공이 공자의 대우에 대해 말했다. "노나라 군주가 계씨를 대우한 것과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고,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겠소". 잠시 후 다시 말했다. 나도 이제 늙어서 당신을 등용할 수는 없소." 공자가 제나라를 떠났다.
齊景公待孔子曰: “若季氏則吾不能. 以季孟之間待之.” 曰: “吾老矣不能用也.” 孔子行.
제경공대공자왈 약계씨즉오불능 이계맹지간대지 왈 오노의불능용야 공자행
매우 혼란스러운 구절입니다. 공자가 관직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나 천하주유를 나설 무렵이 기원전 496년 전후입니다. 제나라 제후 중 최장기(58년) 재위에 있었던 제경공은 그로부터 6년 뒤인 기원전 490년 숨을 거뒀습니다. 따라서 공자가 노나라 대부를 지내고 제나라로 건너갔다면 저 구절이 제법 맞아떨어집니다.
당시 노나라 최고 실권자였던 계손씨의 종주는 대대로 최고위직인 상경(上卿)의 지위를 물려받았고 맹손씨의 종주는 그보단 아래인 하경(下卿)의 지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 아래 다시 장관급인 상대부와 차관급인 하대부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대부의 지위에 있었던 공자에게 상대부를 뛰어넘어 경상의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 파격적으로 보이긴 합니다. 당시 공자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해 그보다 한두 단계 위로 대접해주겠다는 접대성 멘트로 이해한다면 수긍할만합니다. 또 당시 제경공이 칠십대로 노쇠할 때로 노쇠한 시점이라 공자를 기용하고 싶었지만 신하들의 반대를 이길 수 없다는 대목도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이유 중 하나가 제나라에서 여성가무단을 보내 공자에게 능욕을 안긴 간계 때문임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행보입니다. 실제 천하주유 기간 공자가 제나라에 발을 디뎠다는 기록은 일절 찾을 수 없습니다. 공자는 조상의 고향으로 은나라 후손들이 모여 산 송(宋)과 그 주변국인 위(衛) 채(菜) 진(陳) 정(鄭) 같은 약소국을 떠돌았습니다. 당시 공자의 발길이 닿은 강대국은 남방의 초(楚)가 유일했습니다.
공자가 제나라에 머물렀던 시기는 천하주유를 나서기 20년 전 그의 나이 삼십 대 중반 때 일입니다. 당시 노나라 제후였던 노소공은 노나라 실세인 계손씨의 종주인 계평자를 무력으로 쳐내려다가 숙손씨와 맹손씨의 협공을 받고 제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7년간 제와 진(晉)을 떠돌다 숨지고 계평자가 그의 동생을 노나라 제후로 추대하니 그가 공자를 임용한 노정공입니다.
그럼 공자는 왜 노소공을 따라서 제나라로 건너갔던 것일까요? 이 부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공직도 맡고 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노소공을 따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정황을 봤을 때 노소공을 바로 따라나선 것은 아닌 것 같고 제후의 부재 상태에서 삼환의 전횡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일종의 도피성 유학을 떠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공자가 제나라에서 음악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나라에서 순임금 떄부터 전승돼오던 ‘소(韶)’라는 곡을 듣고 심취해 석 달간 고기 맛을 잊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이 때문에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제의 수도 임치에서 노나라에선 접할 수 없었던 주 왕실의 음악과 전례를 접하고 크게 보완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집니다. 또 그렇게 제나라의 예약을 깊이 연구했기에 기원전 500년 경 제나라와 노나라 간 협곡회담에서 공자의 눈부신 활약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당시 공자는 변변한 관직 한번 제수받지 못했던 삼십 대 중반의 학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공자에게 제경공이 상경의 지위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당시엔 제경공을 만났을 가능성조차 극히 드뭅니다. 공자가 제경공을 처음 만난 것은 협곡회담 당시가 처음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따라서 저 구절에는 일종의 역사적 착종(錯綜)이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천하주유 당시 공자를 만난 위령공이나 진소공 아니면 만날 뻔했던 초소왕이 한 말을 제경공의 발언으로 착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제나라로부터 일격을 받아 노나라를 떠나 14년간 해외 유랑을 해야 했던 공자 대신 앙갚음하려는 제자들이 일부러 제경공을 등장시켜 공자의 위상을 드높이려 한 것일까요?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습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찬사를 보낸 동시대 인물 중 거물급으론 두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정나라 재상이었던 자산(子産)과 제나라 재상이었던 안영(晏嬰)입니다. 자산은 청렴하면서도 유능한 통치로 북방의 진(晉)과 남방의 초에 시달리던 약소국 정나라를 부강하면서 외교에 능란한 강소국으로 탈바꿈시켜 공자가 역할 모델로 삼았던 명재상입니다. 안영은 제경공을 도와 쇠락하던 제나라의 위상을 다시 드높여 제나라 최전성기를 열었던 제환공 시절의 재산 관중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산은 공자가 서른한 살 때 숨졌지만 안영은 공자가 쉰한 살 때까지 살아있었습니다. 따라서 안영을 중용했던 제경공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산-안영으로 이어지는 당대 최고 정치가의 타이틀을 공자가 이어받는 의미가 생성됩니다. 공자 제자들은 이를 노리고 일종의 ‘정신승리’를 위해 이 구절을 논어에 삽입한 것 아닐까요? 후대 사람이 볼 때는 가소로운 일입니다. 공자는 비록 현실정치에선 자산과 안영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 사상과 삶의 드라마에 있어선 그 둘을 저 멀리 따돌린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안영의 초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