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21장
재아(재여)가 물었다. “삼년상은 기간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이나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을 행하지 않으면 음악이 끊길 겁니다. 묶은 곡식이 다 떨어지고 햇곡식이 여무는 때이며 불씨를 얻는 나무를 철마다 바꾸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때이니 1년이면 그칠만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처럼 쌀밥 먹고 비단옷 입는 게 편하더냐?”
재아가 말했다. “편안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해라. 군자는 상중에는 맛있는 걸 먹어도 맛있는 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아니하고, 어디에 머물던 편안하지 않아서 그리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재아가 물러가자 공자가 말했다. “재여는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3년상을 치르는 것은 천하가 공통으로 지켜야 할 법도이다. 재여는 부모로부터 3년 동안의 사랑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재아문 삼년지상 기이구의 군자삼년불위례 예필괴 삼년불위락 낙필붕 구곡기몰 신곡기승 찬수개화 기가이의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자왈 식부도 의부금 어여안호
曰: "安."
왈 안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則爲之."
여안즉위지 부군자지거상 식지불감 문악불락 거처불안 고불위야 금녀안즉위지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재아출 자왈 여지불인야 자생삼년연후 면어부모지회 부삼년지상 천하지통상야 여야유삼년지애어기부모호
미국의 포크송 가수 중에 ‘피터 폴 앤 매리’라는 이름의 혼성 트리오가 있습니다. 1960, 70년대 인기를 얻은 트리오인데 이들의 이름은 각자의 이름 중 하나를 따온 것이지만 거기엔 다른 함의도 숨어있습니다.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제자 3명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피터는 베드로, 폴은 바울, 매리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의 맏이이자 예수가 ‘너는 반석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했던 인물로 초대 교황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 생전엔 얼굴 한번 못 봤으나 말 타고 가다가 예수를 영적으로 접하고 떨어진 뒤 유대인의 민족종교를 세계의 보편 종교로 확대시킨 인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자로만 이뤄진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예수를 가장 가까이서 모셨고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된 여제자입니다.
그렇다면 공자의 제자 중에 ‘피터 폴 앤 매리’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공문의 대사형이자 공자의 보검과 같았던 자로가 피터일 겁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영민하게 이해했고 물심양면으로 공자 학단의 확산을 도운 자공은 폴이라고 부를만합니다. 마지막으로 메리는 비록 여인은 아니었으나 공자는 물론 그 제자들 사이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안연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공자 제자와 예수 제자를 비견할 때 예수를 배신한 유다에 해당하는 공자 제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에 비견되는 게 공문십철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유다처럼 파문당하고 대대로 저주받은 제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자가 유다가 수행했던 악역을 엇비슷하게 나눠서 짊어졌다고 할 만한 두 제자는 있습니다. 십철 중 3명 몫을 차지한 염씨 3형제 중 막내였던 염유(冉由)와 지금 이 장에 등장하는 재아(宰我)입니다.
두 사람 모두 공자와 같은 노나라 출신으로 염유는 노나라의 실세인 계손씨의 가재(家宰), 재아는 제나라에서 대부의 지위에 올라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공자의 이상주의와 자신들의 현실주의를 접목해 입신양명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은 각각 자로, 자공과 짝을 이뤄 공문십철에 꼽혔습니다. 염유는 자로와 더불어 정사(政事)에 능하다는 인정을 받았고 재아는 자공과 더불어 말솜씨(언어)에 능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로와 자공은 안회와 더불어 공자 최고의 제자였습니다. 그런 인물과 짝을 이뤄 거명됐다는 것은 자로, 자공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게 뭘까요? 염유는 자로처럼 용맹하고 군무에도 밝아 제나라의 침공을 꺾은 명장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직하고 직설적인 자로와 달리 손해 볼 일엔 나서지 않으면서 출세를 위해선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아는 처세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미워한 계손씨의 재정확충을 위한 가렴주구에 동참했다하여 한때 파문까지 당했습니다.
재아는 언변만 뛰어난 게 아니라 자부심도 컸다는 점에서 자공을 닮았습니다. 하지만 자공이 공자 앞에선 한없이 겸손해진 것과 반대로 공자 앞에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자의식을 드러냈습니다.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것을 싫어했던 공자가 그래서 자공에 대해선 견제구를 던지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재아에 대해선 깊숙한 태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에서처럼 “어질지 못하다”는 치명타를 날리기도 하고 “말만 듣고 사람에 대해 판단하던 것을 재아를 겪고 난 뒤 바꾸게 됐다”고 자책도 불사하며 제자를 비판합니다. 심지어 대놓고 썩은 나무와 썩은 흙담장에 비견할 정도입니다.
재아는 본명이 재여(宰予), 성인식 이후의 이름인 자(字)는 자아(子我)입니다. 공자의 제자 중 자아라는 자를 지닌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 ‘논어’에서 ‘재씨 성을 지닌 자아’라는 뜻으로 재아로 호명됩니다. 공자가 그를 부를 때는 이름인 여(予)를 씁니다. 我와 予는 모두 ‘나’를 뜻하니 그 자의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논어’에서 공자를 상대로 유례를 찾기 힘든 격론을 펼칩니다. ‘논어’ 전편에서 공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부모 3년상의 문제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고 부모 묘를 지키며 아침저녁으로 제사상을 올리고 곡하는 기간을 3년으로 삼으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재아가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여기서 3년은 연수를 말하니 부모가 돌아가시고 두 번째 기일이 돌아오는 때까지 만 2년간 부모의 묘를 지키며 슬픔을 표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3년상을 지켰느냐에 대해선 은나라 때부터라는 설과 주나라 때부터라는 설이 엇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공경대부는 물론 주나라 왕조차 이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공자와 그 제자들이 이를 부활시켰고 한무제 때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 확산돼 송나라 때 주자 등을 통해 사대부 집안에선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됐습니다. 한국에선 고려 때까지는 100일상 정도로만 지켜지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그것도 사대부들의 목소리가 확고하게 커진 15세기 이후 양반가의 상례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3년상을 지내라는 것은 은나라 또는 주나라 때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만 주어진 의무였습니다. 춘추시대의 제후는 물론 전국시대 왕을 자처하는 이들도 3년상을 지내는 법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노나라에서 겨우 하대부를 지낸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 모두에게 이를 의무화한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면 공자의 제자들이 왜 3년상 문제에 대해 그토록 줄기차게 의문을 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국의 왕과 제후조차 지키지 않는 걸 우리가 왜 지켜야 한단 말인가. 재아의 반론은 조리 정연하고 합리적입니다. 그 답변 중 어려운 내용은 '찬수개화(鑽燧改火)'라는 대목입니다.
당시에는 불씨를 얻는 나무를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살구나무, 늦여름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 가을에는 떡갈나무와 졸참나무, 겨울에는 홰나무와 박달나무로 삼았습니다. 찬수는 이를 말하는데 1년이면 그렇게 나무를 바꾸는 것도 한 바퀴가 돌아 원래로 돌아온다는 것을 찬수개화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반박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1년상만 지내고도 네 마음이 편하겠느냐고 감정선을 건드린 것입니다. 논리에 투철한 재아는 이를 감정 섞인 질척한 반응이라 생각해 칼같이 선을 긋고 물러납니다. 재아가 물러나고 난 뒤 비로소 논리적 반박 거리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아기일 때 최소 3년은 부모 품에서 자라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도 최소 3년은 부모상을 치르고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재아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난 뒤이니 남은 제자들에게 이를 호소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공자가 그 깊은 속내를 여전히 감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제자들이 미뤄 짐작하고 따라주길 바랐는데 재아나 염구 같은 현실파 내지 실속파들이 눈앞의 실리나 논리만 따지고 들었으니 속이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질지 못하다”는 심한 말까지 내뱉게 된 거 아닐까 싶습니다.
공자가 과거 임금에게만 적용되던 군자(君子)라는 표현을 꺼내 들고, 누구나 학문을 닦으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던 것과 3년상은 하나의 세트로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엔 3년상이 나라님의 의무인 동시에 권리였습니다. 하늘의 명을 받은 특별한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의례였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자신과 그 제자들에게 그 의무를 지움으로써 그 권리를 획득하려 한 것입니다. 공경대부는 물론 왕조차 지키지 않던 의례를 지켜냄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을 획득하고 그를 통해 그들 지배계층과 심정적으로 대등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고단수의 전략이었던 겁니다.
재아는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모르는 헛똑똑이였습니다. 3년상이라지만 실제론 2년이니 재아가 말한 1년에 다시 1년을 더한 것은 1년상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도덕적 감수성을 압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겁니다. 요즘 유행어를 따르면 “묻고 더블로 가!”였던 겁니다. 이런 재아 못지않게 탁월한 현실감각을 갖췄던 자공은 스승의 이런 뜻을 꿰뚫어 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돌아가신 뒤 공자 제자들이 부모의 예를 준용해 3년상을 치를 때 다시 그 곱절인 6년상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자공은 그때 아마도 하늘에 계신 스승에게 슬쩍 윙크를 날렸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