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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Mar 13. 2021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거절하는 법

17편 양화(陽貨) 제20장

  유비가 공자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공자는 와병 중이라며 사절했다. 유비가 보낸 사람이 집 밖을 나서자마자 공자는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러 이를 듣도록 했다. 

         

  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

  유비욕현공자   공자사이질  장명자출호   취슬이가  사지문지          



  유비(孺悲)는 노애공의 명으로 공자에게서 상례를 배웠다고만 알려진 인물입니다. 노애공의 가신인 셈입니다. 그런 그가 심부름꾼을 보내 공자를 만나길 청했는데 공자가 병을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럼 심부름꾼을 그냥 돌려보내면 될 것을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까지 들려줘 칭병이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시켜줬습니다. 그래도 제자였던 사람에게 왜 그렇게까지 수모를 안겨준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유비가 어질지 못한 짓을 해서 그렇다거나 심부름꾼을 보낼게 아니라 직접 찾아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예에 어긋남을 일깨워줘서 그렇다는 추론이 있습니다. 제 추론은 조금 다릅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감안한 추론입니다.      


  유비는 노애공의 지시로 공자의 제자가 된 인물이니 노애공과 공자 사이를 오가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했을 공산이 큽니다. 공자는 아마도 그 메시지의 내용을 미뤄 짐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또 그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처지였을 겁니다. 그럼 만나서 얘기하면 될 것을 왜 만남 자체를 거절했을까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 자체가 공자가 그에 연관됐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그 메시지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유비가 다시 만남을 청하는 것까지 미연에 방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가 뭐였을까요? 본명이 희장(姬将)인 노애공은 한때 공자를 기용했던 노정공의 아들로 공자가 68세의 나이로 14년간의 주유천하를 마치고 노나라도 귀국할 당시 그를 받아준 노나라의 제후였습니다. 공자가 향년 73세로 숨질 때에도 재위에 있었습니다. 당시 공자의 명성은 상당히 높았지만 나이가 이미 연로했기에 관직을 제수하진 않았지만 유비 같은 사람을 통해 국정의 중대사에 대한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의 자가 중니(仲尼)였는데 공자가 죽은 뒤 노애공이 공자를 ‘니부(尼父)’라고 부르며 추도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선 원로 대접을 해줬음은 분명합니다. 그 추도사가 꽤 절절합니다. ‘하늘은 무심하시지. 노인 한 명조차 내 곁에 남겨두질 않으시다니. 나 한 사람(余一人)만 제후의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둬 외로움에 몸부림치게 하시는구나! 아, 슬프다! 니부(尼父)여, 내가 모범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졌구려(毋自律)!”  

   

  사마천은 사기에 이를 전하면서 이에 대한 자공의 비판도 함께 남겨뒀습니다. “살아있을 적에 기용하지 않고 죽은 뒤에 애도하는 것은 예가 아니며(非禮也) 일개 왕이 아니라 제후에 불과한 사람이 ‘나 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다(非名也).” 그리고 이를 토대로 노애공이 “노나라에서 천명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노애공은 그 말대로 공자가 죽고 11년 뒤인 기원전 468년 무력을 동원해 삼환 세력을 치려다가 거꾸로 제압당하고 월나라로 추방되고 1년도 안 돼 분을 참지 못하고 숨지고 맙니다.  

   

  당시 삼환의 우두머리는 계손씨 8대 종주인 계강자(계손비)였습니다. 제나라가 보낸 여성 가무단을 받아줘 공자로 하여금 노나라를 떠나게 했던 계환자의 아들입니다. 계강자는 아버지와 달리 공자를 높이 평가했는데 공자를 기용하기보다는 자로와 염유, 자공, 자유 같은 그 제자들을 많이 기용해 재미를 봤습니다. 특히 제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낸 염유의 설득으로 공자의 노나라 귀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노애공과 계강자는 그런 공자를 우대하고 그 제자들을 국정운영에 참여시킨 점에선 닮았지만 결국 권력쟁투를 벌이는 사이가 됩니다. 노애공은 삼환을 제압하기 위해 이웃한 강대국 제나라나 패권국으로 올라선 월나라의 힘을 빌리려 했고 위기의식을 느낀 계강자는 뇌물을 동원해 이를 차단하곤 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68년 계강자가 숨을 거둬 삼환의 권력 공백기가 찾아오자 그 틈을 노려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비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위(衛)나라, 추나라, 월나라를 떠돌다 객사하고 맙니다.     

 

  이를 감안하고 보면 노애공이 유비를 통해 전달하려던 비밀 메시지가 삼환 퇴치를 위한 방책 중의 하나였을 공산이 커 보입니다. 공자는 삼환정치의 폐단을 비판해왔고 50대 초중반 노나라 대부를 맡았을 때 삼환 세력 약화를 위한 ‘삼도도괴(三都倒壞)’를 추진했던 인물입니다. 따라서 노애공이 삼환 퇴치를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이 공자였을 겁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 계획이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것을 함께 논의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물론 노나라 관료가 된 제자들까지 위험해질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유비를 만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의도적 회피임을 유비뿐 아니라 공자 주변의 감시자들에게도 분명히 각인시킨 것 아닐까요? 그래서 노애공이 공자의 죽음에 그토록 절절한 외로움을 표한 것 아닐까요? 또 그래서 10여 년 뒤 계강자가 죽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다가 공자의 예측대로 실패했고 누구보다 공자의 뜻을 잘 헤아렸던 자공 역시 이를 내다봤던 것 아닐까요? 


  만일 이 가설이 맞다면 유비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전해지지 않고 이 장에 대한 설명이 부실한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충신불사이군을 강조해왔던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그들의 사표인 공자가 주군의 비밀지령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결코 달가웠을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관련 정보와 기록을 삭제함으로써 그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지 못하게 했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공자로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게 될 때 그것을 우아하게 거절하는 방식을 시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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