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11장
공자가 말했다. “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예물인) 옥이나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악기인) 종이나 북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鍾鼓云乎哉?
자왈 예운례운 옥백운호재 낙운락운 종고운호재
공자가 꿈꾼 이상적 정치는 곧 예악(禮樂)의 정치였습니다. 당시의 예는 왕, 제후, 상경, 대부, 사인, 서인이라는 신분 차이에 걸맞은 관혼상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선비 유(儒)는 그렇게 신분에 걸맞게 관혼상제를 치르는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를 뜻했습니다. 왕족이든 귀족이든 일반 서민이든 복잡다단한 예의를 모두 꿰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중요한 예제를 치를 때는 늘 가이드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유인(孺人)이었습니다.
공자학단은 그런 유의 전문가 집단을 키우는 학원으로 출발했을 공산이 큽니다. 공자는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유의 전문분야인 예를 정치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로 확장해 풀어냈습니다. 그 예에는 반드시 음악 연주가 함께 했으니 그것이 악입니다. 따라서 유인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음악을 연주해야 하며 그 악기와 악공의 수도 어떻게 제한해야 하느냐는 것에도 잘 알아야 했습니다.
공자는 예악에 정통한 유인이 정치의 도를 깨치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춘추시대 사람들 중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인은 거추장스럽고 번잡한 예의범절 문제를 전담해 처리해주는 집사 비슷한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의전담당 비서관 비슷한 존재에게 누가 통치를 자문하고 또 의탁한단 말입니까.
그에 대한 공자의 맞대응 카드는 예악을 국가 통치에 있어 질서와 조화를 다루는 일로 치환시킨 거였습니다. 주 왕실이 약화된 이후 제후국들이 발호하는 상황을 통제하려면 국가의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한데 무력사용 없이 이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예로써 다스리는 예치(禮治)라는 주장입니다. 또 기강과 잘서만 강조하면 두려움과 불편함이 커지기에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어루만지는 역할도 필요한데 그 역할을 악(樂)이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따라서 예와 악의 전문가 집단인 유가(儒家)가 정치를 맡게 되면 전란과 혼란을 피해 질서 있으면서도 조화로운 통치가 가능하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유인의 역할에 대한 합리화의 끝판왕에 가까운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약정치는 정복과 통일이 이뤄진 이후에 필요한 것이지 절대강자가 없는 상황에서 군사력과 궁중암투에 의해 권력찬탈이 빈번하던 춘추시대에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연히 제례와 의례를 지낼 때 보석과 폐백을 뭐로 하느냐와 종이나 북을 어떻게 연주하느냐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냐는 조롱이 쏟아졌을 겁니다.
그럴 때 공자가 꺼내 든 비장의 무기가 바로 도와 덕인 것입니다. 예악의 형식이 아니라 그 운용의 원리를 깨치려면 도와 덕에 통달해야 하는데 그 도와 덕이 바로 통치의 본질을 이룬다는 반박인 것입니다. 예악에 정통하려면 고대의 역사(서경)와 고대의 시문(시경) 그리고 존재의 비의(秘意)가 담긴 주역(역경)에 통달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인 도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품을 수 있는 덕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악의 본질이 옥백과 종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공자의 질타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 피부로 와 닿게 됩니다. 하지만 공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군사, 형률, 외교, 농업, 상업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모두 도와 덕을 터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훗날의 제자백가가 등장한 것 역시 공자가 유가에 적용한 방식을 다른 전문 분야에 적용해 끌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재통일할 때 가장 유효한 사상이 법가와 병가였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유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한고조 유방이 진시황 사후 혼란에 빠진 중국을 재통일한 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유가사상이 부각된 것은 대부분 전쟁기가 아니라 평화기였습니다. 춘추 말기의 공자와 전국시대 맹자의 천하주유가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입니다. 특히 약육강식의 논리가 극에 이른 전국시대에 공자사상 중에서도 근본주의적인 심성론만이 정통이라며 팔고 다닌 맹자의 시대착오성은 소극(笑劇)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가 나폴레옹이었다면 맹자는 나폴레옹 3세라 부름 직합니다.
그럼 수많은 제자백가 사상 중에서 왜 유독 유가의 생명력이 가장 길고 왕성했던 것일까요? 저는 공자의 선점효과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예악의 정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 시경 서경 역경은 곧 문사철(文史哲)이니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인문학적 영역을 선취한 것입니다. 이후의 제자백가 역시 문사철을 아우르지만 유가처럼 일반적 영역을 두루 아우르진 못합니다. 공자가 가징 먼저 깃발을 꽂았기에 후발주자들은 그중에서 자신들의 전문분야에만 깃발을 꼽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는 도와 덕이란 주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제자백가 중에서 이 영역을 새로운 방식으로 치고 들어온 도가나 아예 반기를 든 묵가 정도를 제외하면 변죽을 울리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가의 진짜 라이벌은 인도라는 다른 전통을 기반으로 도와 덕의 문제까지 건드린 불교였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자의 위대함은 예약이라는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의 고뇌를 다른 영역까지 아우르는 일반 영역으로 확장함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한 데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를 통해 서양철학의 범주로 묶이는 존재론, 윤리학, 미학(문학과 음악학) 뿐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일반이론의 구축을 선취한 것입니다.
영민했던 맹자는 이를 꿰뚫어 봤습니다. 그래서 공자 군자학의 형식을 이루던 예악을 최소화하고 그 내용을 이루던 도덕심성론을 최대화하려 한 것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를 외치면서 공자 사상의 고갱이는 도덕심성론에 있다고 주창한 것이지요.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그렇게 둘로 딱 나눠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의 군자학은 결코 맹자가 생각했던 도덕정치로만 귀결되지 않는 복잡 미묘함과 심오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고갱이라고 여겼던 내용에 이상주의가 꽃피고 있다면 껍데기라고 생각했던 그 형식에 현실주의가 뿌리내리고 있음을 맹자는 몰랐습니다. 맹자의 후예를 자처한 사람들은 이를 어렴풋이 눈치 챘습니다. 공자는 지극한 성인이란 뜻의 '지성(至聖)'으로 부르면서 맹자는 버금가는 성인이란 뜻의 ‘아성(亞聖)’으로 부르게 된 무의식적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