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10장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말했다. “너는 ‘시경’의 ‘주남’과 ‘소남’을 공부했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는 것은 마치 담장을 마주대하고 서 있는 것과 같으니라.”
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자위백어왈 여위주남소남의호 인이불위주남소남 기유정장면이립야여
백어는 공자의 외아들 공리(孔鯉)의 자(字)입니다. 백어는 물고기 중에서 첫째란 소리이고 리(鯉)는 잉어이니 모두 물고기와 관련 있습니다. 이는 그가 태어나자 당시 노나라 제후인 노소공이 축하선물로 잉어를 보내온 것에서 연유합니다. 당시 스무살의 공자는 하급관리로 노소공을 위해 봉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사받은 선물입다. 이로부터 중국인들은 물고기 중 최고를 잉어로 치는 관습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논어’에는 백어가 딱 세 번 등장하는데 둘은 아버지로부터 공부가 부족하다는 꾸지람을 듣고 더욱 정진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아무래도 학문하기를 즐겼던 아비의 열정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못난 아들이더라도 그 사랑하는 마음이야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다른 제자와 차별 없이 아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두 번의 가르침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텍스트가 '시경(詩經)'입니다. 시경은 서주시대부터 춘추시대까지 불렸던 노래의 가사 모음집입니다. 크게 3가지 노래로 분류되는데 지역별 민요를 채록한 국풍(國風), 조정의 향연이나 제례 때 연주하는 노래인 아(雅), 종묘제례 때 부르는 노래인 송(頌)입니다.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은 그런 시경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풍으로 각각 11편과 14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주 왕실의 직영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불린 민요를 채록했다 하여 특별히 정풍(正風)으로 분류됩니다. 다른 지방의 국풍은 그 변주라는 의미로 변풍(變風)으로 분류합니다.
시경의 원래 제목은 그냥 ‘시(詩)’였습니다. 사마천은 옛 시가 원래 3000여 편이었는데 공자가 그중에서 빼어난 300여 편을 골라 선집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유교의 경전 반열에 오르면서 ‘시경’이란 제목이 부여됐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시경에는 원래 311편 중 6편은 제목만 전해지고 있어 실제론 305편만 수록돼 있습니다. ‘논어’에서 곧잘 ‘시삼백(詩三百)’으로 등장하는 텍스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경에 수록된 시 중 상당수가 원초적 사랑을 노래한다는 겁니다. 나물 캐러 간 봄처녀가 미래의 낭군을 그리거나, 잘생긴 이웃집 도련님에 대한 짝사랑을 노래하거나, 나랏일로 생이별한 낭군을 그리워하는 시들입니다. 심지어 노골적인 유혹의 노래나 남녀 간의 운우지정을 암시하는 노래까지 등장합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주장했던 후대의 근엄한 유학자를 당황시키기 충분한 노래입니다. 그래서 나온 해석이 인간의 욕정이 아니라 순정이 담긴 질박한 노래라는 겁니다. 특히 주희는 ‘시경집전’이란 저술을 통해 성적인 메타포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까지 인의예지신에 부합하게 뜯어 맞췄습니다. ‘논어’에서 2편 위정 제2장에서 공자가 시경의 시 삼백 편을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 점이 그 강력한 근거가 됐습니다.
공자가 시경에 수록된 시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그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수긍했다는 뜻과 같습니다. 젊은 청춘남녀가 계절과 분위기에 취해 이성에 매료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보통사람인 소인의 애욕을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라봤습니다. 다만 공직에 나설 군자가 애욕에 사로잡힐 경우 일신은 물론 나랏일까지 망칠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고 것입니다.
주희를 필두로 한 송대 유학자의 문제는 이런 군자지도를 사대부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강요한 데 있습니다. 이는 다분히 불가의 승려나 도가의 도사에게 적용되는 엄격한 계율을 의식해 군자지도를 일반 윤리로 규정하려 한 무리수였습니다. 공자가 “군자는 보통사람인 소인과 달라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을 “소인은 군자의 대척점에 위치한 존재이니 모든 사람은 군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로 과잉 규정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자신의 아들에게 유독 시경 공부를 독려했을까요? 3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는 일반적 논어 주석처럼 모든 공부는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기에 질박한 심성을 노래한 시경 공부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백어의 학업성취가 더디다는 것을 눈치채고 비교적 쉬운 언어로 쓰이고 남녀 간의 사랑을 다뤄 흥미를 붙이기 쉬운 텍스트부터 권했을 가능성입니다. 세 번째로는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길 때까지 자식을 생산치 못한 아들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일부러 남녀 간의 진한 사랑을 노래한 텍스트를 권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실제 백어가 자사를 낳은 시점에 대해선 백어가 숨지기 3년 전이라는 기록과 그가 숨진 바로 그 해라는 기록이 엇갈립니다. 또 자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백어는 자사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이혼했다는 내용까지 등장합니다. 외아들인 백어가 부부 금슬이 좋지 않은 데다 늦은 나이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니 이를 지켜보는 공자의 마음이 편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 답답한 심정에 “시경 첫머리에 등장하는 주남과 소남이라도 읽어봤느냐? 거기에 등장하는 진한 사랑의 마음을 배워서라도 손주부터 좀 안겨주면 안 되겠느냐”라고 에둘러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맥락에서라면 "담장을 마주대하고 서있는 것과 같다"는 표현 역시 “이 목석같은 놈아”의 다른 표현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