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9장
공자가 말했다. “너희는 어찌 시를 배우지 않는가? 시는 흥취를 일으키고, 관찰력을 키워주며,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고, 응어리를 분출하게 한다. 가까이는 부모를 모실 수 있고, 멀리는 군주를 섬길 수 있다. 날짐승, 들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
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자왈 소자하막학부시 시 가이흥 가이관 가이군 가이원 이지사부 원지사군 다식어조수초목지명
공자의 예악정치가 도덕정치로 승화하는데 징검다리가 문사철(文史哲)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고대 은나라와 주나라의 예와 악의 뿌리를 더듬기 위한 예기, 그 역사를 짚는 서경, 제례악과 민요의 노래 가사를 채록한 시경, 그 예악의 원리로서 존재의 비의를 풀어내는 역경(주역) 같은 텍스트입니다. 이중에서 공자가 가장 강조하고 사랑했던 것이 시경의 노랫말입니다.
공자는 왜 그토록 그 노랫말을 찬미했을까요? 먼저 각종 제례악에 쓰이는 노래리는 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예악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언어를 이해하는 지언(知言)이 필요할진대 그 모범이 되는 언어가 그 노랫말에 담겼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기 위해 꾸며낸 언어인 교언(巧言)이 아니라 삿됨을 섞지 않은 진실된 언어라 할 수언(粹言)으로 직조돼 있으니까요. 실제 시경의 한자어는 의태어나 의성어 또는 동식물의 이름일 경우만 제외하면 그리 어려운 글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서도 수언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심금을 울리는 야릇한 매력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선 시경을 공부했을 때 효과를 크게 셋으로 나눠 설명합니다. 첫째는 시공부를 통해 거둘 수 있는 미학적 효과에 대한 것입니다. 흥(興) 관(觀) 군(群) 원(怨) 4가지로 훗날 중국 문예비평의 4대 원칙으로 확립됩니다. 흥은 인간의 감정을 격발시키는 것입니다. 시는 원래 노랫말에서 출발했기에 여기엔 언어의 리듬감, 즉 음악성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관은 뭔가를 노래할 때 그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감흥과 공명할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군은 노래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효과입니다. 원은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주는 효과입니다. 군과 원은 훗날 중국 대륙을 붉게 물들인 사회주의 사상이 애타게 찾던 리얼리즘 미학의 단초로 환영받게 됩니다.
두 번째 효과는 윤리적 차원의 것입니다. 아버지를 모실 줄 알게 되고 임금을 섬길 줄 알게 된다고 한 것인데 여기에 부부간에 서로를 아끼는 내용까지 더하면 삼강(三綱)이 이뤄집니다. 실제 시경에서 가장 많은 내용은 충과 효보다는 부부 또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기초가 된다는 삼강오륜은 공자나 맹자가 주창한 것이 아닙니다. 훗날 한나라 때 유교를 국교화한 동중서가 공맹의 가르침을 제국의 입맛에 알맞게 수직적 위계구조로 재정립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공자가 시경에 수록된 시를 읽으며 부모와 자식, 군주와 신하 그리고 남편과 아내 간의 순정을 읽어냈으며 그런 인정 위에 도덕의 정치를 확립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효과는 자연과학적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시경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관저(關雎)'라는 시는 물수리(雎) 한 쌍이 짝짓기하며 내는 소리(關關)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물수리를 말합니다. 또 '부이(芣苢)'라는 시 제목은 질경이라는 풀을 말합니다. 고대부터 부인병 치료제로 쓰이는 약초입니다. 훗날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뜯어먹었다고 할 때 쓰인 표현인 '채미(採薇)'란 제목의 시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글 번역서는 이를 '고사리를 캐러 가자'로 번역하는데 미(薇)는 양치식물인 고사리가 아니라 콩과 식물인 야생 완두입니다.
'논어'를 읽다 보면 공자가 동식물학의 권위자로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공자가 역사서 '춘추'의 집필을 중단하게 됐던 계기가 노애공 14년(기원전 481년) 전설상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이 사냥터에서 붙잡힌 사건 때문입니다. 당시 동식물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공자는 그 현장으로 달려가 발목이 부러져 죽은 기린을 육안으로 확인한 뒤 흐느껴 울었습니다. 자공이 이유를 묻자 "기린은 본디 성군이 나타났을 때 출현하는 동물인데 지금은 성군의 시절도 아님에도 나타나 발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결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이걸로 내가 추구하던 도가 끝났다 생각하니 슬퍼서"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춘추 집필의 종지부를 찍고 2년 뒤 숨을 거뒀습니다.
'시경'에 그 기린에 대한 시도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특히 배우라고 강조했던 '주남(周南)'에 실린 '린지지(麟之趾)'입니다. '기린의 발'이란 뜻인데 기린의 발이 슬쩍 보이는 것만으로도 주체 못 할 기쁨에 들뜬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기린의 발이 부러진 채로 발견됐으니 공자에겐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그렇게 시경에 수록된 시들은 공자의 전문분야였던 예악을 일반적 통치학이자 인문학인 군자학으로 안내한 징검다리였던 동시에 그의 삶에 있어서 징후와 예지의 역할을 수행한 운명의 책이기도 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