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분이 나쁜 상사
첫 직장 출근시간은 8시였다. 강남역 2번 출구로 나와 양재역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한참 올라야 했다. 당시에는 강남스타일도, 신분당선도 없었다. 2호선 지옥철에서 나왔는데 화장실이라도 급해지면 그 언덕길은 그렇게 높고 길고 느껴졌다. 오전 근무 중에 결재를 받을 일이 있었다. 문서를 출력해 결재판에 끼워 넣고 K이사님께 사인을 받기 위해 결재판을 올렸다. K이사님은 버럭 화를 내며 꼬투리를 잡고 결재를 반려했다. 옆에 부장님이 슬쩍 나를 불러냈다.
오전에는 K이사님한테 결재 올리지 마. 아주 매일 아침이 그날이야... 그날, 매직 걸린 날...
K이사님은 남자였다. 오전에는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무실을 한번 둘러봤다. 한 층에 50여 명 직원들이 모여 랜드스케이프 오피스에 파티션 없이 함께 앉아서 근무를 한다. 같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어떤 직원은 출근할 때부터 시무룩하게 지쳐있고, 어떤 직원들은 출근할 때 신이 나 밝게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무엇이 출근길을 신나게 만드는가?
나는 출근길에 흥이 나 있는 직원들을 잡고 서베이를 해 봤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출근길 신이 나 있는 직원들은 하나 같이 출근 전에 무언가 한 가지를 하고 출근을 한다는 것이었다. 헬스장이건, 어학원이든, 독서든, 취미활동이든 무언가 한 가지를 마치고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아침에 무드가 좋았다. 아침에 더 일찍! 그거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출근길 지옥철을 피할 수 있고, 아침에 남들이 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한 가지를 하고 출근한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에 여유가 있었다. 출근 시간에 딱 맞춰 허겁지겁 들어와 자리에 앉아 흘린 땀을 식히며 부채질하는 직원과 여유 있게 출근해 이미 커피 한잔을 마시고 근무를 시작하는 사람과 하루의 성과도 다를 수 있겠다 싶었다.
이후 나는 아침에 영어학원과 골프연습을 시작했다. 출근길에 이익훈 어학원이 있었다. 6시 수업에 들어가면 가락국수 집 긴 의자에 8명씩 빼곡히 채워 앉아 CNN 뉴스를 받아 적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아침 첫 시간에는 이익훈 원장님의 직강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100여 명의 학생들의 등을 일일이 두드리며 격려해 주시는 이익훈 원장님의 훈훈한 미소가 여전히 눈에 선하다. 원장님은 이후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학원이 몇 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학원을 마치고 7시 골프연습장에 가면 직원과 코치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작은 지하 닭장 한 칸에 들어가 고개를 들지 않고 채를 휘둘렀다. 아침 시간에는 사람들이 없어 코치의 레슨을 더 오래 받을 수도 있었다. 2년을 연습하고 마침 기회가 되어 처음으로 필드가 나가 머리를 올렸다. 퍼팅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같은 팀 선배가 놀렸다.
뭐야, 머리 올리러 나왔는데 공이 뜨네?!
18홀 98타가 나왔다. 가방을 뒤져보니 2009년도 8월 8일 스코어 카드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익훈 어학원 자랑도, 골프 스코어 자랑도 아니다. 출근하기 전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해야 하는 것 한 가지를 하고 출근하면 좋겠다. 자기 계발도 하면서 출근길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출근을 한다. 요즘은 골프를 치지도 않고, 어학원도 다니지 않는다. 대신 아침에 밥을 지어 놓고 나왔다. 무엇이든 좋다. 출근 전 딱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출근길에 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