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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장생활

애정이 가는 프로젝트

by 노르웨이신박


25년 넘게 한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되었다. 장수가 늘어나는 이력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이런 일도 했었나 하는 프로젝트가 있는가 하면,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고 애정이 가는 프로젝트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유신이라는 설계사에 입사하자마자 현장파견 지시를 받았다. 임무는 당시 OO대교 (현재 인천대교) 노선을 따라 해상 물리탐사 seismic survey와 해상 지반조사 offshore site investigation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해상 물리탐사는 교량 노선을 따라 12킬로미터 해저지반을 음파탐지기로 검측하고 지층상태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해상 지반조사는 1 km 간격으로 교량의 기초가 놓일 위치에 지반 샘플을 채취하는 일이었다. 해저면에서부터 4-50미터 깊이까지 샘플을 채취해야 했다.

당시 현장 감독관으로 캐나다 A 회사에서 온 로버트 씨는 배불뚝이 동네 아저씨같이 수더분했지만, 검사관으로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채취된 샘플이 바지 barge위로 올라오면(바지는 해상 현장에 세워 놓은 고정식 플랫폼 같은 구조물이다), 그 투박한 손으로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진흙 샘플을 손으로 찔러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심지어 입속에 넣고 오물오물거리다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번쩍이며 다시 메모를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쇼맨쉽이 좋았던 감독관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열악했던 환경에서 시작된 해상 지반 조사는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10번 홀에 도착했다. 교량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인 주탑에서 지반조사 한 공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새벽부터 하루 일정이 시작되었다. 인천 남항에서 출발하여 낚싯배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남항 낚시집 사장님은 부대찌개를 한가득 냄비에 담아 건네주셨다. 그 냄비를 들고 바지에 타고 올라가 점심시간을 기다려 끓여 먹는 부대찌개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5월이지만 바닷바람은 차고 거칠었지만, 보글보글 끓여 먹는 부대찌개는 바다 한가운데 바지 위에도 봄을 전해주는 듯했다.

평소 숙련된 기술로 조사를 해 내려가던 기술자들이 얼굴이 심각해졌다. 수심 20미터, 해저 지반 40 미터지점에서 쨈이 난 것이다. (쨈은 시추조사 케이싱이 땅 속에 박혀 빼지도, 그렇다고 더 깊이 박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온갖 장비를 동원해 시추 케이싱을 빼 보려고 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반나절이나 씨름하다 결국 포기하고, 시추조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 비트와 케이싱을 땅 속에 고스란히 묻어야만 하는 조사 업체의 손해는 막심했다.

힘들게 다시 시작한 시추조사는 순조롭지 않았다. 오늘따라 거친 바람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해저면에서 60미터까지 내려가 샘플을 채취했지만 올라오는 샘플마다 기준에 미달되어 작업이 종료되지 않았다. 로버트만이 최종 작업종료를 내릴 수 있는 감독관이었는데, 작업을 종료시키지 않았다. 70미터, 80미터까지 시추는 계속됐다. 이제 작업을 끝내자는 기술자들과 계속 파내려 가라는 로버트 씨 사이에 신경전이 날카로웠다.

기술자들은 더 깊이 내려가면 또다시 쨈이 날 것이라고 작업을 꺼려하며 사장에게 연락을 했고, 급기야 조사업체 사장이 상기된 얼굴로 현장으로 달려와 온갖 욕설을 퍼붓으며, 작업자들 철수를 지시했다. 로버트 씨도 양보하지 않고, 모든 현장 상황을 메모하고 있었다.

드디어 폭발한 사장은 지금까지 채취한 샘플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시추상자를 치켜올렸다. 나는 일단 흥분한 사장을 말리며 진정시키지만 소용없었다. 사장은 옆에 있던 날카로운 케이싱을 집어 들더니 로버트 씨를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나는 로버트 씨를 대피시키고, 직원들은 사장을 말렸다.

지는 해와 함께 오갔던 흥분도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사장에게 담배 한 대를 건네며, 상황을 진정시키고 5 미터만 더 파 보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사장도 이제 분을 좀 삭였는지 작업자들에게 작업을 지시했다. 마지막 5미터 시추가 잘 마무리되었다. 결국 조사는 해저면 85미터에서 채취한 샘플에 로버트 씨가 승인을 하면서 마무리되었고, 당시 해저 지반 조사 최고 심도 기록이었다.

이렇게 해상지반조사는 끝이 나고, 그 위에 지금에 인천대교가 완성되어 서 있다. 총연장 18.4 km. 영종도와 송도를 잊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교량의 시작에는 이런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올 때면 나는 언제나 오른쪽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공항 터미널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집입하면 저 멀리 안개를 뚫고 인천대교 주탑이 높게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늠름하게 서 있는 주탑과 그 자리에 있었던 조사 바지, 로버트 씨, 조사 업체 사장이 함께 오버랩되어 보인다. 그리고 주탑 아래 85미터에서 채취했던 샘플. 85미터에서 채취한 샘플에 대한 나의 애정이 보인다.


사진: 당시 해상에서 작업했던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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