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준비
L부사장님과 스코틀랜드 출장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스코틀랜드 출장일정 중 자유시간이 하루 주어졌다. 에든버러에 거주하고 계시는 Y박사님께서 우리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집에 가서 와인과 위스키를 마시며 하루를 보냈고, 다음날 Y박사님께서 직접 에든버러 성 관광 가이드까지 해주시며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큰 화산암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 성은 감탄을 금치 못할 장관이었다.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부사장님께서는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셨다. 구석구석 놓치지 않으시고 연신 셔터를 누르셨다. 철컥 철컥 셔터 소리가 컸던 기억으로 필름 카메라였던 것 같다. 부사장님께서는 셔터를 감으시며 나에게 물으셨다.
"신 과장, 지금 몇 살이지?"
"예, 마흔입니다."
"음.. 마흔이면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지?"
"아, 예?"
나의 놀란 표정을 읽으신 부사장님께서는 웃으시면 말씀하셨다.
"허허, 아니, 20년 뒤에 은퇴를 지금부터 준비하라고.. 은퇴 후 취미를 준비하란 말일쎄. 나는 얼마 전부터 이렇게 사진 찍는 걸 취미로 시작했다구. 시작이 너무 늦었지만 말이야... 허허."
부사장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고 뿌듯하신 표정으로 반대쪽 성문을 향해 카메라 앵클을 잡으셨다. 부사장님이 새로운 취미를 가지셨다고 신나 하시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출장 복귀 후.
여느 때와 같이 사무실에서 일하고 하는데, 부사장님께서 인화한 사진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다. 에든버러 성에서 찍으신 사진이라고 하셨다. 에든버러 성에서의 좋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얼른 사진 봉투를 열어보았다. 근데, 아... 이게 모지? 대부분 사진들이 초점이 나가 있었다. 초점이 맞는 사진이 거의 없었다.
"부사장님, 이게 사진들의 초점이..." 나는 말을 흐렸다.
"응? 초점이 안 맞아?"
안경을 바로 잡으시며 사진을 코 앞으로 가까이 대시는 모습에서, 아차... 그때 나는 부사장님의 유난히 두껍고 둔탁한 돋보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려고,
"아, 다른 사진들은 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앞에 한 두장만 초점이 좀 흐리네요."
"그럼 다행이고.."
부사장님은 아시는 듯 모르시는 듯 다음 사진을 넘겨보지 않으시고 자리를 옮기셨다.
나는 은퇴하고 즐길 수 있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가? 준비하고 있는가?
취미는 어떤 것이라도 좋다. 내가 하고 싶고, 하고 있으면 즐겁고, 기다려지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기왕이면 오래 할 수 있는 것이면 좋고, 기왕이면 돈이 많이 안 드는 것이면 더 좋다고 생각하다.
나는 은퇴까지 가지고 갈 취미로 세 가지를 정하려고 한다.
요리, 운동, 글쓰기.
요리는 은퇴를 앞둔 남자라면 must 취미라고 생각한다. 현업에 있을 때는 매월 따박 따박 가져다주는 월급봉투로 칭찬과 인정을 먹고살았다면, 은퇴 후 월급봉투 없이 무엇으로 칭찬을 받으며 살 수 있겠는가? 코비드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요리를 시작해 지금까지 100여 개의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놓으니, 이제는 냉장고를 열고 있는 재료를 골라 한 가지 요리 정도는 뚝딱 해 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가끔 창의라는 이름을 빌어, 듣보잡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리를 시도하는 것에 아내와 딸은 손사래를 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운동으로 자전거를 탄다. 출퇴근 (왕복 24킬로) 자전거를 타면 기분이 좋아진다. 출근 전 뭔가 하나를 해낸 기분이 든다. 업무가 끝나면 업무의 연장으로 짐에 가서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한다. 주말에는 딸과 자주 테니스를 쳤는데, 요즘 딸이 너무 바빠 얼굴 보기가 힘들다.
글쓰기는, 한 수필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 한 편을 쓸 때 자편을 노려보며 머리를 뜯는 나는 무용함의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 글이 누구에게도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 삶을 밝히는 희미한 등댓불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무용함의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떤 취미도 좋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은퇴 후 멋진 취미생활 하나 정도는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부사장님도 이제는 사진 전무가가 되어 당신의 취미를 즐기시며 은퇴 후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즐기고 계시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