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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바다

천사

by 노르웨이신박

오랫동안 연기되었던 오프쇼어 일정에 윤곽이 잡히며 갑작스레 분주해졌다. 자주 오지 않는 특별한 현장이라 팀에서는 신참을 교육생으로 데리고 갈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바다 현장에 나가면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데 혹을 하나 달고 나가게 생겼다. 나는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부탁해 간신히 교육생 자리를 하나 마련할 수 있었다. 교육생으로 이탈리아 친구 레오가 결정되었다.

승선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배에 올랐다. 140명이 탈 수 있는 중형 설치 선박이다. 400톤 크레인과 70톤 크레인을 데크 중앙에 갖추고 있었고, 두대의 리모트 컨트롤 로봇을 양 사이드 (포트, 스타보드 사이드)에 장착하고 있는 든든한 작업선이었다. 배에 올라 승선자 명단을 보는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알고 지내던 또 다른 신참 교육생으로 배에 오른 것이다. 그 친구는 반갑게 인사하며 자기는 오프쇼어가 처음이라며 걱정스럽고 수줍은 모습으로 잘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졸지에 혹을 양쪽에 붙이게 되었다.

준비를 마치고 항해가 시작되었다. 새벽 5시 15분에 핸드오버 미팅을 시작으로 선장과 함께하는 데일리 미팅, 본사 사무실에 현장 진행상황을 알리는 미팅, 안전 관련 미팅, 작업 준비 미팅으로 이어졌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빡빡한 일정은 신참들의 정신을 어리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배는 6층 구조로 복잡하면서도 입구와 출구가 모양이 모두 비슷해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 신참들은 쉽게 방향감각을 잃었다. 한 걸음 뒤에서 보니 내가 처음 배를 탔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25년 전. 첫 직장에 출근해 얼마 안돼서 일이었다. 사면 안전성을 해석하는 당시 도스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프로그램이 잘 돌지 않았다. 자꾸 에러가 나는데,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알 길이 없어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때 K차장님이 내 자리로 오시며, 뭐가 잘 안돼?라고 웃으시며 물으시더니, 현란한 손놀림으로 에러를 금세 수정해 주셨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자리로 돌아가시는데,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내려와 나를 도와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같았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신참들에게 나는 웃으며 물었다. 왓츠 롱? 메 아이 헬프유? 신참들은 반갑고 수줍어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몰아 물었다. 나는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사무실로 올라갔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 여기저기 간섭하며 오지랖을 넓힐 필요는 없지만, 내가 겪은 같은 시행착오를 후배들이 거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건 먼저 그 길을 가본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여유와 친절이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머지않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스스로 깨우쳐 어렵지 않게 알게 될 일이지만 말이다.

그때 나를 웃으며 도와줬던 K차장님은 후에 나와 함께 영종도 바다를 바라보며 3년간 같은 함바집 밥을 먹었다.

세월이 흘렀다. 북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헤매는 신참이었던 나와 천사가 되어 나를 도와주셨던 K차장님의 모습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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