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야
배에는 메틱(의사 또는 간호사)이 함께 승선한다. 지하층 한쪽 옆에 작은 병실이 있고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시설을 갖춘 진료실이 있다. 간단한 멀미나 피로를 호소하는 작업자에게는 메틱이 약을 처방해주기도 한다. 알레르기 환자에게 주사를 놔주기도 한다. 상태가 심한 응급 환자가 발생할 경우 코스트 가드에 지원을 요청하면,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코스트가드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와 환자를 이송해 가게 된다.
5년 전 영국 바다에서 지반조사를 할 때 메틱 본인이 뇌출혈로 쓰러져 헬기에 실려가는 응급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아랫배가 산처럼 불러 거동조차 힘들어 보이는 메틱이 늘 작업자 휴게실에서 줄 담배를 피우는 걸 지켜보며 걱정을 했는데 결국 그 사달이 난 것이다.
이번에 승선한 메틱은 노르웨이 간호사 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메틱은 자그마한 체구의 늘 웃는 인상이었다. 젊은 시절 병원과 약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고, 배에 오른 지는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경험이 많이 베테랑이었다. 가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와 혼자 커피를 마시며 창문밖을 내려다보는데 눈가에 깊은 주름은 웃는 얼굴에 여유와 경험을 더해주는 것 같았고, 차분하고 고운 목소리는 편안함과 신뢰감을 주었다.
이건 정말 엔지니어링 예술이에요. 나는 오일과 가스가 이렇게 어렵게 생상 되는 줄 모랬어요. 정말 경이롭습니다.
250톤이 넘는 해저 구조물을 해상 현장으로 운반해 설치하기 직전 오버보드 (배에서 바다로 옮기는 작업)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메틱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치요. 이 순간을 위해 조사를 시작으로 설계, 제작, 운반, 설치, 테스트 등 수많은 과정과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친답니다. 이렇게 설치된 구조물을 통해 우리가 쓰는 가스가 생산되는 것이죠.
나는 마치 뭐라도 된 듯 으쓱이며 거들먹거렸다.
정말 놀랍고 감사하네요. 우리가 쓰는 기름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생산되는지 몰랐어요..
현장을 내려다보는 메딕의 눈가에는 진심 어린 감정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작업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메딕을 바라보며 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접하는 일상들.
주유소에서 넣는 기름, 손가락 하나로 터치하면 들어오는 전기, 수도꼭지를 돌리면 꽐꽐 쏟아지는 뜨거운 물. 옷장을 열면 가득한 옷. 밥상에 올라오는 모든 음식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서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묻어나 있는 것인가? 밥알 한 톨에 농부의 땀 3방울이 어려 있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기름 한 방울, 가스 한 줌을 생산하는데 보이지 않게 노력하고 수고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손길을 생각하며 감탄하고 감사하는 메딕의 눈물을 통해, 별다른 생각 없이 설치만 빨리 끝내고 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손길들을 생각하니, 새삼 주변은 놀랍고 감사한 것들 천지였다.
놀라움과 감사는 250톤 구조물처럼 거대한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메딕의 두 손에 곱게 들린 작은 커피잔 안에서도 얼마든지 놀라움과 감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스카이라운지 앞 유리창에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췬다. 메틱 옆에서 내 눈가도 촉촉한 눈망울이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