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북상하는 태풍 플로리스가 내일이면 영국에 도착한다는 예보가 전해졌다. 폭풍의 방향과 크기로 보아 모레면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해상에 도착할 것이다. 벌써부터 바람이 세고 거칠다. 신참은 평소보다 피곤하다며 연신 하품을 해 댄다. 멀미 초기 증상이다. 메딕에게 가보라고 권했다.
메딕은 신참에게 멀미약과 함께 멀미를 진정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먼저, 배 위층보다는 아래층에 있는 것이 좋고, 단 음식을 피하고, 가까운 바다를 보지 말고, 먼바다를 바라보라. See the Horizon. 먼바다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멀미가 좀 진정될 수 있다고 했다.
수평선을 바라보라는 얘기를 전해 들으니 어린 시절 만화영화 태양소년 에스테반이 생각났다. 신참은 계속 말을 이어 갔지만 내 귀에는 신참의 말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만화영화의 주인공 태양소년 에스테반의 주제곡만 내 머릿속에 맴돌았을 뿐이다.
어릴 시절 참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많이 있었다.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만화영화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거실 소파를 폴짝 폭짝 뛰어내리며 흥건하게 땀을 한번 흘리고 나면 만화가 시작됐다. 때로는 방송시간 관계상 만화 주제가가 중간에 끊어져 버리면 그렇게 김이 셀 수 없었다. 한 주간 동안 그렇게 기다리던 만화가 시작되면 거실 장식장 위에 놓인 작은 티브이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넉이 나간 듯 입을 헤벌짝 벌리고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티브이 속으로 들어갈라. 어여 뒤에 가서 소파에 앉아서 보거라.라는 엄마의 속소리가 어렴풋 들리는 것 같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원하는 영상을 손가락 하나로 검색해 까딱이면 되는 세상이지만, 기다림이 있었던 시절의 낭만도 때로는 그리워진다. 생각난 김에 잊었던 태양소년 에스테반 주제가를 찾아 들어 보았다.
모험의 날개를 활짝 펴라. 태양소년 에스테반.
젊음의 사전을 펼쳐보라. 불가능이란 말을 없다.
수평선 물길 가르쳐주는 바닷 갈매기와 함께.
힘차게 달려가자. 먼 수평선으로.
이곳 북해 바다에서 수평선을 바라봤다. 먼바다에 나와 있어 바닷 갈매기는 볼 수 없지만, 하루 종일 태양소년 에스테반 멜로디만 흥헐거리며 리듬을 타는 기분 좋은 하루였다.
내일모레 다가올 태풍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