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상일기 / 북해

리더

by 노르웨이신박

폭풍이 잦아들기까지 항구에 머물기로 했다. 항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도 배 안에서는 할 일이 많다. 지금까지 작업에 사용했던 장비들은 내보내고, 앞으로 사용할 장비들을 들여온다. 이것을 계획하고 검토하는 엔지니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다. 그동안 쌓였던 쓰레기도 내보내고, 앞으로 먹을 식량과 물도 보충해야 한다. 항구에 머무를 때 인원교체도 진행된다. 업무를 마치고 나갈 사람은 하선하고 그들과 교체할 사람들이 승선한다.

새로운 멤버들이 들어오면 배 안에는 활기가 넘친다. 그동안 지쳤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 에너지가 넘치고, 새로 승선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에 에너지가 넘친다. 어떤 선원은 1살 베기 아기를 데리고 배에 올랐다. 배에는 아이스크림이 무한제공이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기를 보고 모두 웃음꽃이 핀다. 물론 아기는 배가 다시 출발하기 전에 내리게 된다.

배가 항구에 멈춰있는 동안 회사 매니저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 받고, 배를 둘러보며, 현장을 격려하는 일종의 현장 위문방문 같은 것이다. 이번에 우리 배에도 매니저들 방문 계획이 계획되었다. 우리 회사와 컨트렉터의 매니저들의 방문이다. 오프쇼어 매니저도 오늘은 특별히 단정한 복장에 면도도 깔끔히 하고 미팅에 들어왔다.

예전 영종도 현장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현장 날씨가 좋지 않았다. 짙은 안개와 잦은 비로 현장 공사가 멈추기 일쑤였다. 연약지반을 개량하는 공사에 자재가 도착하지 않아 대기하는 날이 많았다. 어려운 현장상황은 공기지연으로 연결됐다. 이런 소식을 보고 받은 회사 임원단이 현장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하게 현장 주변을 정리하고 현장 진행상황과 여러 가지 현장의 어려움을 읍소하고자 브리핑을 준비했다. 임원단이 도착하자 현장 날씨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맑아졌고, 자재공급도 원활히 재개되었다. 이를 본 임원은, 현장 날씨 좋구먼. 일하기 좋네. 이런데 왜 공기가 지연되지? 현장에서 뭐 어려운 거 없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하며 헛기침을 몇 차례 켜더니 뒷짐 지며 현장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다. 보통 임원들이 오면 현장 날씨는 맑아지고, 막혔던 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잘 돌아가는 듯하다.

오늘도 날씨가 맑았다. 평온히 내리쬐는 햇살에 언제 폭풍이 왔었냐는 듯 바다는 평온했고, 배 뒤쪽에 실린 장비들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탑 매니저들이 10시에 미팅룸으로 들어왔다.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두 명의 여자 임원은 우리 회사 프로젝트 매니저 씨셀과 프로젝트 디렉터 씰리에 (부사장급)였고, 두 명의 남자는 컨트렉터의 사장과 임원이었다. 씰리에는 중앙에 자리를 잡았고 다른 임원들도 그 주위에 앉았다. 회의가 끝날 무렵 씰리에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들 너무 수고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이곳 트롤에서 생산되는 가스는 전 유럽으로 공급됩니다. 전 유럽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10%가 이 현장에서 공급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수고의 조각들이 모여 전 유럽의 원활한 에너지 공급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끝까지 안전하게 작업을 마치고 모두 건강히 집으로 돌아가길 기도하겠습니다.

씰리에의 진성성 있는 메시지는 배에 타고 있는 90여 명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이곳이 이렇게 중요한 현장인 줄 몰랐다는 선원들이 많았다.

나는 전해진 메시지에서 리더의 모습을 보았다. 짧지만 강하고 부드러운 메시지는 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동기와 에너지를 부여하는 모습은 며칠 전 쓸고 지난 간 폭풍처럼 강력했고, 선원들의 안전을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은 여름 바닷가 비친 평온한 햇살 같이 따스했다.

리더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강한 동기부여와 따듯한 배려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선상일기 /.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