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존재와의 연애, 그 모양에 관한 나의 생각
어째서 사랑을 하고 행복이 넘쳐날 때는 키보드 앞에 앉아도 글이 써내려 가지 않더니, 또 하나의 이별을 마주하고선 이렇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행복한 생각은 그 순간순간 즉흥적인 기분에 취하되, 슬픈 생각은 사람을 침체시켜 즉흥과 이성을 오락가락하며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하게 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연애라는 말을 들으면 일직선상에 두 사람이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림이 떠오른다. 사랑이나 그리움 이런 감정의 가치 말고, 나와는 다른 타인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기 위한 관계의 방식 그 모양에 관련해서 말이다. 그 일진선상에는 눈금이 있다, 1에서 10까지. 그저 위치를 위한 표기로 유의미할 뿐, 높고 낮음이랄까 가치를 담고 있는 숫자는 아니다. 가운데 지점을 두 사람이 만나는 절충점이라고 했을 때, 이 일직선의 자는 각자의 가치관이나 믿음 등을 뜻할 수도 있고 선택의 기로를 뜻할 수도 있겠다.
한 친구는 절충점을 두기 보단 각자의 위치 1과 10에 서서 누구도 포기하고 양보하지 않고 독립적인 모양의 연애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열 번 중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하나의 결론을 도달해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 하나의 절충점은 필요하다. 쉽게는 올여름휴가 여행지를 고르는 것부터 상대의 부모님을 만나는 시기나 그 의미라던지 혹 결혼한 이들에게는 육아의 방식이라던지. 성장 환경의 차이, 그로부터 확립된 사고방식의 차이, 남녀의 차이, 경제적 능력을 포함한 조건의 차이, 각자에게 영향을 주는 주변인들의 차이 등으로부터 각자의 위치를 정의하며, 이는 상대적인 거라 어떤 연애에서는 내가 1에 서 있기도 하고, 어떤 연애에서는 내가 3에 서 있기도 한다.
1에 서있는 나와 10에 서있는 J는 정반대편의 상대를 그토록 원했다. 쉬이 닿을 수 없음에 동경 같은 마음을 한편에 품고 그리워한 것인지 나와는 다른 점이 대단하고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랫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애잔하게 시작한 연애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10만큼의 차이가 있었고 적어도 두 사람의 가운데인 5까지는 너무 멀기만 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시작의 온도로는 부족했다. 30년 가까이 다른 삶에서 만들어진 나는 1에 J는 10에 서 있는 것인데, 성큼 5에 다다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너무 고되고 힘든 만남이었다. 나는 J를 만나면서 사랑하고 갈등하는 반복에서 2칸이나 나의 원래 방식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J는 나보다 더 양보하고 배려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3과 7에 서 있었다. 이렇게 각자가 많이 자신을 깎고 상대를 배려했는데도, 우리에게는 아직 그 가운데 지점이 멀기만할 뿐만 아니라 나를 마주하고 있는 J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지치고 닳아갔다. 내가 포기한 2칸은 희생이란 단어로 스스로를 옭아매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상대의 양보보다 내가 내놓은 것이 더 커 보이고 더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기에. 그 연애의 막이 내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애초에 비슷한 사람과 만나라는 옛말이 이런 것이구나.
그다음 연애를 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J와 만나면서 나와는 너무 달라 치열하게 싸웠던 것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J의 그것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그 점이 닮아있었다. 그때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상대를 위해 내가 내놓은 칸은 결코 포기나 양보가 아니라 내 것을 내놓은 만큼 그의 것이 내게 스며들어 온전한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J가 남겨놓은 것은 나의 습관이 되었고, 그것은 그 전의 나의 것보다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I와의 연애는 시작부터 3과 7이었다. 웃음과 눈물 코드마저도 비슷했던 I에게는 선망적인 느낌보다는 편하고 기대고 싶은 혹은 기대게 해주고 싶은 따뜻함이 깃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J와의 연애를 통해 희생 아니 배려를 하는 법을 배운 나는 성큼 5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내게 스며든 그의 방식도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사랑의 온도는 그런 내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따뜻하게 지켜주었다. 그런데 I는 가끔 5로 성큼 와주었지만, 또 어느새 돌아보면 다시 7로 돌아가 있는 듯했다. 괜찮았다, 내가 좀 더 움직이고 기다리면 되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그의 부동을 나를 향한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 그는 날 덜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는 이전의 나처럼 이 눈금 위를 오가는 배려의 몸짓에 읻숙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I가 날 덜 사랑하는 것으로 얼룩져 상처받은 뒤였고 그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즈음에 I는 막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말이다.
J와는 애초부터 10이나 차이가 났지만, 서로 이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력했던 우린 많은 조정의 시간을 거쳐 여러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비슷했던 I와는 적어도 나의 의지와 인내가 그만큼 강하지 못했고 어쩌면 타이밍의 차이로 그 조금 더의 발걸음조차 옮길 조정의 시간이 버티지 못하고 끝이 났다. 나는 또 다른 생각에 다다랐다, 아늑할진 아슬아슬할진 모르겠는 이 선 상에 서 있으려는 힘 즉 이 관계를 유지하고 지키려는 의지와 인내가 또 다른 중요한 전제라는 점을.
내게 연애는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눈금자 위에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릴 수 있다. 절충점에서 만나기 위해 서로 약간만 옮겨도 되는 애초부터 비슷한 지점에 서 있는 연애가 가장 부럽고 바라는 형태이겠으나, 그것 이전에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선 위에 서서 이 관계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의지와 인내라는 것을. 그것은 사랑의 온도가 될 수도 있겠고, 상대가 나의 배려를 알아주는 따뜻함이 될 수도 있겠고, 외로움이라는 절박한 상황처럼 각자의 타이밍이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