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애나 가족애를 넘어선 어떤 특별한 그런 거
내겐 자매가 있다. 무려 6살이나 차이나는 언니. 문득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녀와 나, 두 사람.
자매 (姊妹)
[명사] 여자끼리의 동기(同氣). 언니와 여동생 사이를 이른다.
언젠가 친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자매의 관계를 통해서 양보를 배웠나 아니면 질투를 배웠나?
항상 질투했다. 내가 10살이 되면 언니는 16살이 되었고, 그 16살을 따라잡자 언니는 저만치 22살이 되어있었다. 어떻게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6년이나 앞 선 그녀의 존재는 항상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토록 언니를 이기지 못해 안달이었던 나, 그것은 단순히 아집강한 막내의 시기어린 승부욕이었을까 아니면 항상 맨 뒷번호를 맡던 큰 키만큼이나 조숙한 여자아이의 성질부림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그노무 물려받은 물건들이 제일 싫었다. 언니가 썼던 누래진 탬버린과 고무가 늘어나 제대로 쳐지지도 않는 캐스터네츠를 들고 학교를 가야 했다. 몽땅거려진 크레파스는 휴지로 싸서 써야 손에 묻지 않았고, 그러다 아빠가 새로 사주신 크레파스는 정작 너무도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소중히 보관만 했었다. 물감이 스며들어 얼룩덜룩한 팔레트 위에 오래된 물감을 볼펜으로 밀고 밀어서 짜써야했다. 그렇게 나는 언니 이름이 매직으로 적힌 구닥다리 학용품을 쓰고 있는데, 고등학생이 된 언니는 새 포스터 물감과 팔레트 세트를 사서 등교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이 사실들에 어지간히 어린 나는 신경질적이었다.
어디 학용품만 물려받았겠는가. 언니의 옷, 머리핀, 책, 인형 등등. 그래서일까 어느날부터 나는 '내 것'과 '새 것'이란 것에 친구들보다 조금 더 집착이랄까, 형용하기 힘든 그런 마음을 쓰곤 했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어 언니와 어느새 비슷한 체격을 지니게 되었다, 비슷한 키와 비슷한 덩치. 내가 입고 싶어 사들인 옷들은 곧 언니의 레이더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물려받던 에서 나눠입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싫은 마음에 언니와 다툼을 벌였다. 결국 나는 욕심많고 옷을 나눠입기 싫어하는 고집쟁이가 되었고, 엄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이제서야 내 것을 찾았다 여겼는데 그마저 빼앗겨 서라움에 눈물 마를새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물건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더 많은 곳에서 언니를 더 질투를 했었다. 엄마가 귤을 사오면 고3인 언니를 위해 탱글탱글하고 이쁜 귤만 남겨놓고 물러터진 것만 먼저 먹으라고 해서 질투가 났다. 게다가 명절 음식을 만들때 (왜 그것이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다 큰 언니는 전을 뒤집게하고 어린 나는 손도 못대게 해서 왜 어린아이 취급만 하는지 투덜거리기도 했다. 아빠 엄마 언니 모두가 있는 쌍커플이 나만 없는 것도 서러웠고, 나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대조되는 하얀 언니의 피부까지도 모든 것이 내겐 부족하고 부러운 것들 뿐이었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언니보다 먼저 어른이 될 수 없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만 골라 안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우리사이에 반전이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론 나의 중학교 입학, 두번째는 대학 입학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맞벌이부모님을 대신하여 대학생이 된 언니는 내게 더 많은 관심을 주었다. 일찍이 철이 든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쉬이 부모님께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고 밤마다 배갯잎을 적시곤 했는데, 어느정도 커버리고 대화가 통하게 된 대학생 언니와 말 못할 고민을 나누게 되었다. 언니는 아주 훌륭한 청취자(Great Listener)였다. 그러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집을 나와 살면서 내가 그토록 꿈꾸던 독립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당연하게도 나는 가족의 정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언니를 향했던 질투어린 마음은 먼 과거 얘기가 되고 우린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직설적인대다가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은 못 되던 터라 언니에게 그간 질투났던 점들을 다 털어놓았었고 그녀는 담담히 들어주었다. 나의 이런 어린 시절의 상처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질투어린 이야기들을 '웃기네'라며 비웃고 넘겨집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진지했고,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내가 좀 더 컸을 땐 반대로 나를 질투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를 '언니'라는 존재보다 앞서 '우린 같은 그것'이라고 느끼게 된게. 자신보다 좋은 대학에 간 동생을 보며 뿌듯하면서도 나는 왜 그때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햇을까란 마음이 들었을 때라던지, 내가 호주에서 공부할 당시 놀러온 언니가 영어를 쓰는 나를 보고 자신의 영어는 혹여 도태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을 때 등을 언니로부터 직접 들을 때, 아 이 여자도 나랑 똑같았겠구나 처음으로 느꼈다. 어쩌면 6살이나 어린 동생이 언니에게 대들어도 둘째로 자란 엄마는 어린 동생 기죽지 않도록 언니편을 들지 않았던 터라 언니는 엄마가 동생만 좋아한다고 느꼇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항상 어른의 언니를 부러워했듯이, 그녀는 직장인이 되면서부터 꿈을 꾸고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 나를 부러워했겠구나.
양보
이 깨달음으로 눈멀게 했던 질투라는 까만안경을 내벗어버리자 자매라는 관계를 통해 얻은 양보란 것도 내게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번은 친구와 단 둘이서 여행을 가게 된 적이 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친구는 나와 여행을 가기에 앞서 많은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호불호가 강한 나와 여행을 가면서 부딪힐까봐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여행을 해 보면서 결정에 있어 내가 우호적이고 배려를 잘 해줘 놀랐다 한다. 한창 어린 막내로 자라면서 가족의 결정에 대게 따르며 자란터라, 모든 결정에는 고행이 따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주의다. 이에 친구와 결정을 같이 함에 있어 대게 따르고 결과에 긍정적으로 생각해버리는 편이었다. 귀찮아해서 그렇지 노력하면 상대의 마음을 눈치채거나 맞춰주려하는 점은 분명 존재하며 이에 따른 배려도 자동적으로 나올때가 있다. 그럴 땐 적잖이 자신에게 놀라곤 한다, 내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아마 이건 20년넘게 섬세한 언니의 여동생으로 살아오면서 배우고 습득된 습관같은 것이겠지.
결론
같은 성을 가진 두 사람이 항상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6년이나 많이 살아온 그녀이지만, 나는 그녀를 '나는 너고 너는 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과 인간성을 지니고 살지만, 나의 모든 것은 언니에게 있고 언니의 모든 것도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은 친구의 언니도 빠리바게트 언니도 아닌 나의 진짜 언니이기에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내 것이기도 한 것이며, 자매애나 가족애를 넘어선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자라면서 나는 그녀를 끊임없이 지켜보고 질투하면서 동시에 그대로 닮아가고 내게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되서야 우린 서로가 됬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가 이 글을 본다면 조금 질투어린 고백들이 부끄러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오늘의 우리가 속하게 되었음을 만든 이야기들이 아닐까 생각하며 써내려가본다. 마무리는 쏘스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