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만날 약속 장소를 정할 때면, 목적지의 가까운 건물 앞이나 지하철 역 몇 번 출구가 되곤 한다.
여느 때와 같이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곳은 나를 포함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그들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핸드폰만 직시하며 연거푸 폰만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은 한결같은 무력한 표정으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나란한 고층 건물 사이를 쌩쌩 달리는 차들만이 마주하고 있었다. 불현듯 도심이 차갑다고 묘사되곤 하는 것은 아마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토록 시끄럽고 분주한 도심 한 가운데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가만가만 기다리는 나는 고독했다. 적적했다. 만남에 들떴던 마음은 기다림이 늦어지는만큼 차분히 가라앉아 버렸다.
호주 시드니에서 기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동네에서 일 년 간 살았던 적이 있다.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면, 지하철 역이 아닌 Newcastle beach(의 젤라토 아이스크림 가판대 앞)에서 만나기로 하거나 Civic Park의 브로콜리 나무(이름 모를 브로콜리를 닮은 이 나무를 우린 그렇게 불렀다.)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당시 2D폰이었던 터에 기다림이 지루하진 않았을까란 생각이 스치려는 찰나, 회상한 그 나날들의 기다림은 전혀 적적하지 않았다. 그 젤라토 가판대 앞은 바닷가를 마주 보기 딱 좋은 자리였다. 여기에 앉아 Keren Ann의 Not going anywhere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두 귀에 꽂으면, 파도소리와 꼭 어울린 음악에 스르르 자신을 놓게 되었다. 신고 있던 쪼리를 벗고 앉아 발가락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들이 흘러가는 느낌에 몸을 맡기다 보면 그 기다림은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었다. 한 여름, Civic 공원 나무 그늘 아래 그 넓고 시원한 나무 몸통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내 등허리까지 시원해졌다. 햇빛 쨍쨍한 맑고 투명한 하늘과 공원에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고 있노라면 몸도 머리도 말랑말랑해져 기다림은 이내 쉼이 되곤 했다.
영국 런던에서 따로 여행하던 친구와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을 때, 어느 사무실 건물 앞이 아닌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로밍을 해가지 않은 폰으로 어떻게 이 기다림을 극복하지라는 걱정이 앞섰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사원 앞 나란한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두 다리 편하게 뻗고 있노라면 유적지가 주는 고즈넉하디 웅장함에 파묻히는 동시에 종교 사원이 주는 평온함에 빠져,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난 이 유적지에 얌전하고도 고스란히 담겨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여행을 합류하게 된 친구들과는 버스정류장이 아닌 나보나 광장 오벨리스크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우선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부터 나를 설레게 했다.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아래는 시계탑 아래서 기다리는 여느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인 두근거림을 더하였고, 친구가 나를 못 찾진 않겠다는 안심 섞인 상상도 떠올랐다. 나보나 광장의 오래된 분수대에 앉아 있으면, 물때가 잔뜩 낀 옥색의 표면이지만 굳이 손을 올려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소중하게 품은 소망의 동전들이 분수대 물 표면 아래 햇빛에 내 비쳐 눈부시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를 보는 내 마음까지도 반짝이는 듯한 느낌에 나는 그토록 황홀해했다. 그러다보면 새들이 푸드덕 소리를 내기도 하고 가수를 꿈꾸는 기타 든 사람의 노랫자락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멍하니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기다릴만한 것이 되었다.
이토록 기다림의 장소는 낭만을 주기도 했다.
이다음 약속에 친구는 광화문 5번 출구에서 만나자 제안했다.
친구보다 퇴근이 약간 빠른 나는 앞처럼 이왕이면 기다릴만한 곳에서 기다려 보자는 생각에 5번 출구의 청계천 입구에서 기다리겠노라 대답했다. 졸졸 흐르는 청계천의 물소리가 들리고, 낮이면 햇빛에 그리고 밤이면 조명에 얼룩지는 물가의 반짝임이 배경이 되는 그곳의 기다림은 꽤 괜찮았다. 청계천에선 높고 조여 오는 구두를 살짝 벗고 맨발로 앉아 있어도 그 누구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확실히 사람들 표정도 더 여유로웠다. 그 여유를 빼닮아 조금만 더 둘러보니, 차가운 줄만 알았던 도시가 이렇게 반짝이고 여유로운 곳이었나 싶은 순간이 왔다. 고층 건물에 쌩쌩 차들이 다니는 곳으로부터 한계단 내려온 곳일 뿐인데. 그리고 이곳이라면, 이런 곳이라면 조금 더 기다릴만 한 듯했다.
안국역이 아닌 경복궁 앞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는, 운 좋게 수문장 행진하는 시간에 맞았던 터였다. 궁 앞 카페에서 파는 3천 원짜리 유자차를 홀짝이며 궁 앞에 수문장 행진을 구경하며 친구를 기다렸다. 도도하게 쌓아 올려진 여유로운 곡선의 기와지붕과 당당한 태평소의 소리를 배경 삼아 서 있는 그곳에서 전통이 주는 그 알 듯 모를듯한 평화로움에 더하여 나는 달콤한 차 맛을 음미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낭만 또는 일루션(Illusion, 환상)이라 생각한다. 물론 친구는 나의 이런 생각에 기다림은 누구(Who)를 기다리냐에 더 달린 문제가 아닐까라고 말해서 그것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게 만들었지만, 이번엔 그저 어디서(Where)라는 기다림에 조명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기다림 장소의 낭만 또는 일루션은 낯선 여행지만이 주는 특별한 환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조금 둘러본 내 일상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OO역에서 만나자보다 공원 브로콜리 나무 앞에서 보자 혹은 경복궁 앞에서 수문장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1시에 보자라는 제안이 있다면, 기다림의 기우를 떨치고 만남의 두근거림에 울렁이는 자신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릴만한 곳에서 기다리다 보면 기다림은 더 이상 '기다림 자체'가 아니었다.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내가 발 닿은 이 곳을 더 사랑하게 되는 시간을 벌게 된다는 낭만적 기회라는 생각까지도 다다랐다. 적어도 내겐.
곧 봄이니 이는 더 더할나위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