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운명론적 사랑관
문득 건조하디 무던하던 여느 겨울날에,
하필
그런 날에
네가 놓고 간 양말도 아닌
네가 준 귀걸이도 아닌
네가 아파서 먹던 감기약을 발견한다면.
일요일 오후3시, 분홍색 줄무늬 수면양말을 신고서 내 방에서 바라보는 차가운 창 밖 풍경은 이 포근함이 배가 돼 발가락을 절로 꼼지락거리게 만든다. 목 끝이 간질간질해진 나는 가습기를 켜기 위해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난데없이 그곳에서 잊혀졌던 너가 툭 튀어 나온다. 하필 오늘 같은 연한 갈색의 날에, 하필 다른 것도 아니라 네가 아파서 먹던 그 약이 말이다. 이젠 아프진 않은지 자연스럽게 지금의 너를 떠올리게 하는 그것. 소기의 목적을 떠올리며 약을 탁자 위에 올려두곤 다시 서랍을 뒤진다. 팔꿈치를 굽혀 겨우 꺼낸 가습기를 싱크대로 가져가 깨끗이 씻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다. 가습기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주둥이에 마개를 꽂고선 전원을켜고 잘 작동하는지 지켜본다. 꼼지락거리던 발가락들이 얌전해지는 순간이다. 묵혀있던 시간만큼 버벅거리던 가습기는 이내 곧 뽀얀 수증기를 내뿜는다. 그제서야 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누른 채, 등 뒤 탁자 위에 올라간 너의 감기약을 먹먹해한다.
그렇게 떠올려진 너를 그릴 때면 나는 이렇게 되뇐다.
Love is all about timing.
우리가 다른 때에 만났더라면 어떠했을지 너도 상상해 본 적 있는지. 갓 십대가 지난 나는 나보다 5년이 앞서 있던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딱 그 차이 만큼, 5년이 지나고 나자 너의 그 이해되지 않던 모든 것들을 내가 똑같이 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 그래서 너는 그렇게...' 너를 따라잡고 너를 이해하고 너를 사유하게 되었을 때, 이미 우린 함께 있지 않았다. 오늘 나는 네가 생각이 났다. 그리워한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지금 내가 너를 만났더라면. 그때가 아니라 지금의 너와 내가 말이다. 나는 또 너의 앞선 5년을 따라잡지 못하고 버거워하고 있을까? 아니. 우린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되어있을 거라고 믿음을 넘어서 확신마저 든다. 서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우리에게 그 차이는 예전만큼 많은 변화와 성장을 따르지 않기에, 같은 가치관을 지닌 우린 나란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우리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상대를 그리고 우리라는 것을 노래하는 그런 연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겐 그 사람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너와 나 사이의 그 비껴간 타이밍으로부터 잦아드는 안타까움에 나는 너를 생각한다. 네가 이 얘기를 듣고 내가 지나가버린 과거에 감성적 희망을 품은 채 회상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반박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가습기를 끈다. 내가 아끼는 도톰한 하얀색 패딩을 입고 그를 만나러 나간다. 내 동그란 쓰레기통에 얌전히 놓여져 있는 알약 한 알을 떠올리다 손 흔들며 다가오는 그를 마주한다. 문득 맞잡은 두 손을 그의 주머니에 넣고 나란히 걷는 그에게 약간의 죄책감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찬 바람이 내 볼을 붉게 물들이자 나도 모르게 후- 입김을 분다. 불어나온 내 입김이 뽀얗게 피어오르자마자 공기 중에 흩어지는 그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내게 수증기를 내뿜지만 그것이 이내 사라지는 가습기와 같고, 또 그 모습은 이 이야기와 같음이란 것을 알게 된다.
내게 사랑은 타이밍에 달린 것이다. 여태껏 나를 채운 남자들과 전혀 다른 지금의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지금, 그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여름의 나였으면 혹은 어떠한 그 일이 있기 전의 나였다면, 나는 그를 정말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지금의 나는 그런 너를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지만, 그 때의 어리고 환상에 젖어 있던 내게 너는 너무도 버거웠다.
좀 더 운명론에 취해보자. 집에 가려 내리막길을 걷던 나와 도서관을 가려 오르막길을 걷던 너와 마주했던 대학 후문의 그 푸른 해 질 녘이 우리의 타이밍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갔더라면, 그 날이 방학을 앞둔 시험기간이 아니었다면, 마주한 뒤 내가 문자를 먼저 보내지 않았다면, 그 날 밤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 때가 아니라 몇 년 뒤 우리가 함께 하기로 했다면 지금 내가 너의 감기약을 애써 무던한 척 만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순간 요즈음의 행복은 잠시 잊혀지고, 나는 눈물이 날 것 같다. 결국 사랑은 타이밍에 달렸기에 우리네는 공중 속에 사라지는 수증기의 뽀얌을 지켜보며 몽롱해질 수 밖에 없다.
so, again, love is all about ti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