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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Dec 22. 2015

내 짐을 내어 준다는 것

나약함이 아닌 신뢰를 내어 주는 것


내 가방은 내가 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규칙 중에 하나. 나는 이상하게도 내 짐을 나누는 것이 불편하다. 남의 도움이 내키지 않기도 해서 가능한 스스로 내 가방은 내가 들려고 노력한다. 그 짐을 든다는 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말이다. 첫째로 나에게도 충분히 그만한 힘이 있으며, 둘째로 자기의 일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해결함이 응당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으로 '여자'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약한 척하고 싶은 순간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근육량이 많이 탑재된 게 남자라 하여도 그에게도 똑같이 무거운 짐이며, 무거운 게다가 남의 짐을 드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기에 다시금 마음을 잡고 그 유혹을 떨쳐내곤 한다.



얼마 전 일이다. 지하철에서 무거운 내 여행 가방을 사이에 두고 그와 실랑이를 펼쳤다. 분명한 나의 가방이었기에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지만, 가방의 무게에 더해진 그의 강한 아귀힘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들게 되었다. 내가 들겠다는데 굳이 뺏어가는 그가 이해도 안 되고 심지어 짜증까지도 났다. 결국 나의 짐을 드는 것을 포기 혹은 양보하게 되었고, 가방을 빼앗긴 나는 가벼워진 만큼이나 무기력해졌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대신해 나를 나약하게 길들이는 그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당연 잇따랏다.


이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 들은 언니에게선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그가 널 좋아하게 좀 내버려 둬.


이 말 앞에 나는 덩그러니 선 채 눈꺼풀만 멀뚱히 껌뻑였다. 그가 내 짐을 들어 주고 싶은 것은 나를 나약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의 고행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나는 언니말처럼 그가 그 방식으로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위협받던 마음을 내려놓고 보니, 정녕 좋아하는 이의 무거운 짐을 나눠 드는 것은 참으로 따뜻하고도 다정한 일이었다. 나의 빵빵한 빨간색 여행가방을 들고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씨익 웃음이 나왔다. 유아독존이던 내가 나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선 그것이 참 든든하다고 다정하다고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들어오지 못하도록 양 손으로 꼭 붙들고 있던 마음의 문을 그가 흔들자, 내가 붙들고 있던 힘의 반동만큼 더 많은 틈이 열려버렸다.


물론 나누려는 짐은 비단 이 물리적으로 무거운 가방에만 한정되진 않을 것이다. 내 짐을 내어 줌은 상대에게 나의 힘들고 지친 면까지도 보여줄 수 있음이고 이것은 돈독한 우리 사이의 증표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내 짐을 나누는 것은 곧 그의 짐도 나눌 수 있음을 뜻했다. 내가 그에게 의지함으로써 그도 내게 의지할 수 있는 틈을 열어주게 되고, 그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우린 그렇게 점점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져 가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혼자서 꿋꿋하게 자신의 짐을 들고 갈 때보다, 서로의 짐을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편이 훨씬 따뜻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이 추운 한겨울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아, 이게 마음을 나눈다는 것인가.


아직은 선뜻 나의 짐을 들어달라고 먼저 말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누가 들어주겠노라 하면 감사히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사랑하는 이들의 무거운 짐을 흔쾌이 나눠 들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짐을 나눈다는 것은 나를 약하게 보는 것도 혹은 그렇게 만드는 것도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순수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서로의 고행을 나눌 수 있는 사이를 증명하는 끈끈한 일이기 때문이다.



짐이 무겁다면 들어주게 하자. 누구나 무거운 짐을 들고 갈 일이 있으며, 언젠간 혼자서 들 수 없는 짐도 생기기 마련이기에.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서로에게 내놓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이 아닌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내어 놓음을 뜻하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었던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의 Paul은 이렇게 말했다,

People belongs to People.


이토록 짐을 나누어 드는 일은 꽤나 다정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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