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잦아들면 아쉬움이, 아쉬움이 잦아들면 이성이 오겠지.
영화와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지새우던 첫 만남,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시간이 지나도 서로에게 바랄 것 하나 없던 순수한 그 처음만 계속된다면_
한 잔 두 잔 기울이던 달짝지근한 소주에 엮어, 마주한 그 애틋한 시선에 우린 금세 서로에게 빠졌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란 것을 시작했다. 그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면서 '다음에 더 좋은 사람이 찾아오면 어쩌지.'라는 고민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기에 나는 이를 확신한다. 그를 만나면서 사랑받는 포근하고 따뜻한 행복감에 젖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구와는 다른 그 어떤 다른 모양의 배려와 이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 그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고,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린 참 다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함은 그에게 있어 모두 맞춰야 하는 것이고, 나는 공존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갈등이 당면할 때마다, 게으른 나는 그저 피하고 싶었다. 내가 그의 바람대로 바뀌면, 그가 만족하고 우리의 평화도 유지되었기에 이로 족하다 여겼다. 하지만 나는 결국 지쳤다. 참고 변해도, 내 고집은 받아주지 않는 그에게서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사랑하기 위해 변한 나의 모습을 나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이 연애에 진정 나 자신이 있을까란 계속된 자문이 드는 목 죄는 만남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좋아죽겠는 마음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가치관에서 오는 괴로움 사이에서 많이 힘들었다. 그를 계속 좋아하기 위해, 더 버티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 분명 그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최선의 끝에, 우린 아직 서로를 좋아하지만 연애라는 것은 그리고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사랑만 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리고 몇번이나 불거진 문제는 영원히 번복될 것임을 깨달아 나는 그보다 조금 빨리 이쯤에서 냉정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헤어지자.
더 정들고 더 사랑해버리고, 잊기 힘든 따뜻한 추억들을 더 쌓기 전에. 여기서 멈추는 것이 참으로 현명한 일이란 것을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우린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흔해 빠진 말 한마디인데 눈물이 나는 건,
다름 아닌 '그'가 한 말이라서,
철저히 '우리'의 이야기라서.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조금은 후련하다는 기분을 안고, 그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요가 수업을 들으러 갔다. 집중하여 운동하다 보니 바라던 대로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게 되어 흡족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힐 즈음, 천장에 매달린 해먹에 들어가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 자세로 명상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부드럽고도 차가운 천이 내 몸을 감싸안자마자 나는 오롯이 혼자라는 내겐 이제 그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해먹에 매달린 높이에 더한 공포에 휩싸인 채로 나는 그를 흐느껴했다. 그리워했다. 그곳을 벗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구차하게.
집으로 걸어갔다. 해지고 화난 감정이 가라앉고 마주친 동네에는 속속들이 그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떡볶이 집도, 영화관도, 토스트 포장마차도, 동네 편의점에도.. 집 입구로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주차장을 살폈다. 그의 차가 있을까 봐.. 무심코 집어든 우리집에 두고 간 그의 스웨터에는 그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지금 유일하게 그를 느낄 수 있는 그것이. 헤어지자고 할 때도 잘 참던,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줄을 놓아버렸다.. 퉁퉁 불은 눈을 감은 채 샤워를 하고선 아주 약간은 상쾌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침대맡 귀마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이제야 겨우 귀마개 없이도 코 고는 그의 옆에서 잠들 수 있게 되었는데.. 책꽂이에 튀어나온 우리의 사진이 무심하다. 잔인하다. 아직은 손댈 용기가 없지만,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사진을 꺼내 작년 다이어리 사이에 꽂아 두겠다는 다짐을 하고선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도, 막상 헤어지고 나면 이렇게 허전함이 깃든다. 쌓인 감정으로 다툼 끝에 헤어짐에 있어, 괴롭고 화났던 감정들은 그 헤어짐으로 대게 보상이랄까 해결되어 버린다. 날아가버린 화난 감정 다음으론 사랑했던 마음이 남기에 아쉬움이 고스란하다. 싫어하는 마음을 잘라냈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까지 금방 싹둑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아쉬운 마음에 그에게 전화를 할 뻔한 순간에, 좀 더 살아보고 좀 더 연애해본 언니의 조언이 내 이마를 쳤다 - "화남 다음에 아쉬움이 오듯, 아쉬움이 가고 나면 이성이 자리 잡을 거야." 헤어지기로 백번 고민하고 결심했던 이유를 되내이며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토록 이별은 힘들다. 시작에 앞선 들뜬 마음에 평정을 찾으려는 고군분투와 고백이란 무시무시하지만 두근거리는 두려움의 어려움은 이별의 그 어려움에 비할 데가 못된다. 그리고 나는 이별을 두고,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가 없을 것이라 단언했었다. 하지만 함께했던 추억과 정이란 변수에서도 찰나의 후회가 밀려오는 것을 보니 후회라는 것에 과연 크기가 있을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별에는 함께 쌓아온 시간과 부대낀 추억들에 휩싸이기에 결코 순조로울 수가 없는 일대의 일임에 분명하다. 어찌 됐든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
잘 지내.
내 모든 진심을 토해낼 말을 그토록 찾아 헤매었는데, 나는 겨우 이 말 밖에 찾지 못했다.
배꼽 끝이 아파올 만큼 끌어올린 온 마음을 이 한마디에 담아본 적이 있을까 싶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작년 크리스마스, 함께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다 너와 나의 발목에 생긴 이 피딱지가 떨어져 나가고 상처가 아물 즈음에는 너도 나도 지금보다 더 괜찮아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