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물러나 내 것을 내어준다는 것
그나마 스스로를 덜 포기할 수 있거나 네가 포기해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한 두 친구들이 해준 말로, 사실 충격이었다. 사랑이란 관계에 있어 포기라는 우중충한 단어를 갖다 붙이다니! 어찌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는 조언으로도 부족한 내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삼십 년 언저리라는 긴 시간 동안 완전히 다른 것들을 보고 배우고 겪고, 태초부터 변치 않는 다른 성향을 지닌 두 성인이 있다. 그 두 사람이 만나 대게의 시간, 장소 그리고 가치관 등 수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함께'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다. 완전하게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것을 공유해야 하므로 갈등은 불가피하게 된다. 연애를 '퍼즐'에 비유했던 적이 있다. 사람은 각자의 특유의 패턴이 새겨진 퍼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연애를 하면서 다른 두 퍼즐 사이에 그림을 그릴 것인가 퍼즐을 깎아 딱 맞는 모양으로 만들 것인가로 비했다. 여전히 전자를 희망하긴 하지만, 어쩌면 양립하는 퍼즐을 진정한 '함께'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갈 여행지나 함께 살 집을 정하는 것도 결국 한 개여야 하고, 함께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가도 한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사무치게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여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딪히고 미운 부분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상대에게 있어서 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 친구들은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스스로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그 포기를 덜 해도 되는 상대면 좋을 것이고 또 상대를 위해 내 것을 포기해도 참을 수 있을 정도라면 관계는 보다 유지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고로 함께 하기 위해 내 본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은 전혀 손해 보는 일도 자신을 잃는 일도 아니라, 한 관계에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기 위해 상대방의 공간을 배려해주는 한 발짝 물러섬인 것이다. 그 포기의 감내 혹은 수용 여부에 따라 관계의 지속 여부가 결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나를 내려놓아야 지치지 않고서 관계에 속해져 그것을 유지할 수 있기에.
나는 '함께'를 위함이든 뭐든 나의 것을 양보하는 일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를 놓는 일은 마치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기만한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관계란 것은 내게 버거운 것이 되었고, 결국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그를 만났다. 여느 관계처럼 우리에게도 폭발적인 사랑의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들이 지나 편안하고 익숙해진 시간이 도래하였다. 서로의 익숙함이 토대가 될 만큼 많은 생각을 나누고 가치관을 공유하게 되자, 관계 유지를 위해 우린 부딪히는 부분에서 서로가 한 발짝씩 물러나서 만나야 했다.
그렇게 어느 부분에선 상대가 한 발짝 물러나야 내가 한 발짝 들어갈 수 있었고, 또 다른 어느 부분에선 내가 한 발짝 물러나야 그가 한 발짝 내게 들어올 수 있었다. 내 것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 조금 지쳐갔지만 동시에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이전과는 달리 그는 친구들이 말한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깃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온전한 내 모습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은, 그 내놓은 빈자리에 내가 사랑하는 그의 온전한 어떤 것이 고스란히 물들어 버려 다시 내 것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그토록 낭만적인 일이란 것을 말이다.
하지만 고집쟁이에 씩씩이 같던 내가 서서히 포기하고 물러서길 마음먹자 그는 안타까워했고 그가 채워주지못해 내가 포기하는 듯해서 스스로를 자책하며 힘들어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주 힘겹게 대단한것마냥 나의 일부분을 내어주기 시작했기에 그도 그렇게 느낄만하다. 덧붙여 나는 그에게 영원한 확신을 줄 수 없는 부분에서 항상 스스로 옥죄어 괴로웠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확신을 그는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없었기에 그리고 서로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감내의 크기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여기서 끝난 거 같다. 어쩌면 사랑의 크기를 떠나 이 만남의 끝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나는 매달릴 수 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헤어지자던 그의 말이 바로 전날 달아오른 내 볼을 맞대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던 달콤함이 그저 한낱 여느 연인들의 습관 섞인 행동 중에 하나였음을 가늠케 했기 때문이다. 환상이었다. 착각했다. 그 모두는 허상에 불과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토록 사랑해도 결국은 헤어지면 끝이다.
그가 선물한 꽃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는 이별을 고했다. 그 사실이 여전히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자 어쩌면 그렇게 그는 한 편의 마음을 금세 정리하고선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이 들었다. 나보다 더 착하고 고집스럽지 않은 그런 사람을 만나 손을 잡는 상상까지 다다르면, 비어버린 가슴을 쑤시는 따끔함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런 상상하는 자신에게 질려버리고 만다. 그리고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인지 아니면 이제 다시 혼자라는 사실인지 헷갈리는 것을 보니, 이기적인 내가 그 누굴 힐난할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분명 괜찮아질 것이다. 너 하나뿐야라는 지독한 로맨티시스트를 믿지 않기에,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우린 다 괜찮아질 것이다. 이내 좋은 추억으로 바뀌고 상대가 내게 준 선물들을 고마워할 것이다. 그는 내게 반짝이는 팔찌만을 두고 가지 않았다. 한 발짝 내어주어 상대의 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그의 것이 되는 일이 얼마나 다정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해 준 선물을 남겨 놓았다. 그의 칫솔도 버리고 면도기도 버렸지만, 그가 준 그의 어릴 적 사진은 버리지 못했다. 아마 20년 후, 나는 내 아이에게 웃으며 이렇게 거들먹 거릴 것이다. "얘야, 이 사람이 바로 엄마 어릴 때 그렇게 나 좋다고 쫓아다닌 남자애란다." 우린 헤어졌지만, 그는 나에게 먼 미래에 한 편 추억으로 웃음 지을 수 있는 선물도 놓고 간 소중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