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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Oct 07. 2016

나는 아직 이별 중이다.

마음을 추스른다는 것과 다시 홀로 선다는 것

이별은 '우리 헤어지자, 안녕' 이 한마디로 모든 과정이 끝이 나는 게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과 다시금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필요하기에, 그러 하기에 나는 아직 이별 중이다.


미련 많은 나는 끊임없이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를 참 많이 좋아했다. 연애는 2주에 3번 만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었는데 일주일의 거의 매일을 보게 되었을 만큼이니까. 줄어든 나만의 오롯한 시간에 고군분투하던 나는 이내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내어주었다. 나만 있던 삶에 다른 사람도 공존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행복했기에. 단적인 이 예를 위시로 많은 나의 부분들이 변하고 우리의 공존을 위해 길들여져 갔다. 우리의 만남이 남들보다 그렇게 더 빽빽이 채워져서일까. 그래서일까, 그때는 생각보다 우리에게 빨리 다다른 익숙함에 조금씩 권태가 스며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아니 나도 그가 준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불안하게 되었다. 주기만 하는 아가페적인 성인은 되지 못하였기에, 나는 내가 준 만큼의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그와의 마지막 즈음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의 눈치를 보던 게 생각이 난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퇴근하고 굳이 멀리까지 나를 보러 오는 그가 의무감에 젖어서 온 게 아닐까. 나와는 습관처럼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헤어질 때 등 한 번 두드려 주는 게 우리 사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거의 두 달 가까이 회사 일에 치여 기력이 없고 지쳐만 있던 그는 어느날부터 다시 생기가 넘쳤다, 아마 그 때가 그녀와 연락을 시작한 그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눈치를 덜 보게 되었던 시기이니까 기억을 한다. 물론 권태의 시기라고 해서 그의 그 방황을 정당화 할 순 없다. 안정기의 관계의 권태를 극복하는 다른 많은 방법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남 일도 드라마도 아닌 절대적인 나의 일이니까. 그저 그는 왜 그랬을까에 대한 일말의 약간의 이해랄까.


그렇게나 그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다 결국 그의 눈치를 보는 마지막의 내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그런 내가 짠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사랑할 땐 그렇게나 상대만을 바라보는 열정이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건강한 만남을 염두해 자신도 상대도 골고루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모든 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가 아직 보고 싶지만 동시에 겁나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돌이킬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도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면 그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이고, 이번 이별을 극복해야만 다음엔 더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기억이다. 문득 언니의 폰을 보다 그녀의 남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화면엔 '내 반쪽♡'이란 (당시에는) 너무 닭살스러워 약간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폰을 던진 기억이 있다. 반쪽이라니. 우웩.


나는 내가 연애할 때도 잘 못 느꼈던 그 반쪽이란 말이 이제서야 그게 참 와 닿는다. 홀로가 되어버린 나는 말 그대로 '반쪽'이었다. 그와 만나던 오랜 시간동안 내 일상의 반은 그와 함께였기에 그렇지 않은 지금은 그 반을 잃어버린 기분이랄까.  퇴근을 하고 나면 멍하다. 갑작스럽게 비워진 주말이 멍하다. 예전에는 퇴근하고 수영도 배우고 중국어 학원도 다녔고 주말에는 혼자 쇼핑하거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의 반쪽을 잃어버린 지금은 아주 허전하고도 루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음습했다. 연애 중에 내 공간을 지키리라 잔다르크인 마냥 그렇게나 싸웠었는데, 그 과정 속에서 결국 나는 아마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나 의지적여버렸다. 그를 그토록 사랑하느라 나를 사랑하고 홀로 서는 법을 잠시 잊어버렸었다.


이처럼 이별 뒤에는 그를 향한 나의 감정을 추스르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다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도 필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운동을 쉬면 그 간 쌓아왔던 근육이 사그라든다. 힘쓸 근육이 사라져 다시 부지런을 떨며 운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다시 마음을 잡고 운동을 한 번 두 번 시작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튼튼해진 근육이 온몸 구석구석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마치 이 근육과 같아서 홀로 서는 것, 나를 다시 사랑데 집중하는 것도 천천히 다시 쌓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별 중에 해야 할 또 다른 과정이다.  


이렇게 이어진 생각에 휩싸이자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웹툰도 기사거리도 더 이상 볼 게 없자, 오랜만에 SNS 계정에 접속했다. 참- 다들 잘 살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잘. 그리고 세상엔 이쁜 사람도 많고, 재밌는 활동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들 잘 살아간다, 어떤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지는 몰라도. 그러자 나도 다시 운동도 하고 이쁜 옷도 싶고 자기 계발도 하고 싶어 졌다. 스스로부터 나오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사랑과 시선을 받는 것에서 오는 자신감과는 다른 그런 류의 자신감으로 이뻐지고 싶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물건을 다 없앤다고 해서 이별이 아니다. 나의 상처받은 마음으로부터 잘 추슬러져야 한다. 언젠가 나도 모르게 그와의 추억을 농담 섞인 회상으로 말할 수 있기 전까지.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을 때는 아마 스스로 홀로서기를 잘 해내어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뜻할 것이다. 아마 그때가 이별의 끝이겠지.


내일은 아침 일찍 미뤄두었던 남색의 에코백을 빨래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난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 머리카락 색깔에 맞춰 염색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달달한 망고링고 맥주에 빨 때를 꽂고선 양화대교를 걸을 것이다. 걷다가 중간에 그의 생각이 남다면 팔자걸음으로 걷겠다.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 걸음걸이를 걸으면 살짝의 희열감이 올 것 같다. 아 그럼, 그가 또 싫어했던 유니클로에서 산 줄무늬가 들어간 남색 바지를 입고서 가면 더 기분이 풀릴 것 같으니 그러기로 하자. 양화대교를 지나 버스를 타기 전 책을 한 권 살 것이다. 좋은 글 귀를 읽다 공감을 하게 되면 그로부터 오는 살짝의 카타르시스 같은 게 있기 때문에 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물을 흘리던 이별의 저 끝 바닥을 치던 시기는 지났다. 그 시기만 지나고 나면 뭐 외로울지언정 사실 눈치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살짝은 설렘이 있는 것 같은 이별의 과정이 다가온다. 나는 그렇게 이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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