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희한하게도 나는 항상 그와 나 사이 어떤 유리창이 있는 게 아닐까란 느낌을 받았다. 상대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훤하게 다 보였지만, 결국은 상대가 내보이는 것까지만 볼 수 있었다. 투명하지만 딱딱한 유리창이 우리의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의 허리 뒤춤에 숨긴 노트를 볼 수 없었고, 발 뒤꿈치가 밟고 있는 어떤 것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그가 습관처럼 내게 던진 말들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나는 네가 독립적이어서 참 좋아. 나는 네가 내게 사사건건 집착하지 않아서 좋아. 그래서 내가 너를 만난다니까."
한두 번이 아닌 지속적으로 이 관계의 공중에 돌아다닌 이 말들이 이 관계를 얼마나 한정시켰는지.
나는 그리 독립적인 타입도 아니고 집착하지 않는 타입도 아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담담한 진심은 이 관계에 있어 나는 그래야 하는 사람으로 명명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의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나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기에 내버려두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 자연스러운 단계를 밟아 나도 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돼버린 때였다. 관계의 약자가 되어버린 나는 그가 그어놓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참 떨리고 두려웠다. 즉, 이 유리창이 놓인 관계는 합의가 된 것이었으나 감정이 바뀌니 강요받는 것이 되어 버린 아이러니함.
그가 우리 사이에 만들어버린 유리창을 열 수 없었다. 그가 허물없이 훅 들어오는 타인을 두려워한 것인지 허물없이 내비칠 자신의 비밀을 두려워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은 그가 이런 관계를 의도했는지 아니면 미움받기 두려웠던 내가 스스로 만들어 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땐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보다 그저 그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관계가 최선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노트를 앞으로 꺼내어 보여주거나 발뒤꿈치를 들어 한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는 한, 나는 그것들을 보고 싶다고조차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냐면 대학 때 내가 너무도 좋아했던 사람이 내가 밝고 경쾌해서 좋다는 말에 어둡고 상처 어린 모습을 내비치기를 참 많이 주저하게 되었던 것처럼, 나는 감정적 약자가 돼버리면 그 당당한 자존감은 어디가 버리고 상대를 기준으로 걱정하고 떨어 버린다. 그렇게 나는 유리창을 젖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거나 유리창이 젖히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이 관계도 다른 관계들처럼 이별이 다가왔고, 그것 역시 아프고 상처였다. 그런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와 헤어지고 오늘까지도 나는 울지 않았다. 숨을 참고 불 켜진 전등을 눈이 따갑도록 쳐다보아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유리창은 이별의 원인이 아니었지만 이별 후의 이 담담함의 원인이 아닐까. 아마도 그가 나 자체라기보단 유리창이 있는 연애를 할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닐까란 느낌을 받은 것이 은연중에 꽤 커서 그런 것 같다. 누구에겐 이것이 말장난 일 수도 있고 그가 진짜 그러했는지 아닌지 사실여부는 알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로 연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본인이 받은 느낌이나 생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어쨌거나 나의 어떤 한 면모가 그에게 있어 이 연애의 목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 이 아픈 헤어짐 끝에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유리창은 다 내보이지만 막상 손을 뻗으면 차가운 경계였기에 나는 내내 그가 나의 마지막 연애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안락함이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