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쉽던지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한다. 그런데 요즘은 멀리서 봐도 비극처럼 느껴진다. 고향 가는 텅 빈 고속도로가 그렇고, 둘에 하나는 문을 닫은 가게만 봐도 그렇다. 거리엔 사람이 없어서 그저 조용한 느낌이다. 원래부터 사람이 없던 곳이라 착각할 만큼 한산하고 또 한산하다.
나는 지난 6월부터 특고/프리랜서가 되었다. 고작 4개월 차여서 그런지 재난지원금 신청 자격엔 부적합 상태인 것 같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감소한 소득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데, 당시 나는 근로자였고, 4대 보험도 회사에서 내주는 정직원이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기준이 애매모호해서 시작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해당 기사엔 다양한 댓글들이 보였다. 백수인 박지성, 김연아도 해당되는 게 아니냐면서 정말 필요한 사람한테 돌아가야 맞는 것 아니냐는 분분한 의견들. 소득 기준을 제시해줬으면 좋겠기는 한데, 일정 소득보다 감소한 사람들을 깡그리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런데 내가 대한민국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런 연예인들과 같은 분류군으로 묶였다는 것은 좀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이왕 하는 거라면 연봉이 누군가의 월급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핍절하게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애초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나.
입에 칼을 물고 덤비는 댓글을 볼 때마다 ‘환멸’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생각건대, 비난의 화살을 겨누는 것이 당연한 사람은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없다. 절대 죽어 마땅한 사람도 없다. 부쩍 2030 세대의 죽음을 자주 보게 되는 요즘이다. 그들은 대부분 마음이 아파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다. 코로나가 불화살이 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남겨진 사람들만이 그저 생각할 뿐이다. 그들이 홀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인데, 타인의 삶을 너무나 쉽게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데, 한 줄의 댓글은 1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람을 죽이고 있다.
때로는 편을 가르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면서 특정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는 메시지를 보낸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바칠 만큼 지독하고 악랄하게 마음껏 저주를 퍼붓는다. 분이 풀릴 때까지 상대방에게 고통이 전달될 때까지. 그가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오늘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내 앞에 서 있던 그는 아닐까. 이틀에 한 번씩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앞집 아줌마는 아닐까. 한 번씩 동네에서 나와 부딪히거나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 중에는 과연 없을까. 막상 소환하면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된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라던데, 정말 그럴까.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부모는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그 어떤 것도 추측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것처럼 더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눈물이 없고, 웃음도 없다. 웃음이 눈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커의 웃음’이란 게 그렇지 않을까. 웬만한 ‘좀비’ 가지고는 되지도 않는다. 그럴수록 더 자극적으로 더욱 잔인하게 새로운 것을 뽑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뻔한 것, 투명한 것, 잔잔한 것은 ‘오래되거나 낡은 것’이다. 그러면서 ‘착하고 선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프레임까지 씌워졌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매도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반대로 할 것이다. 죽이는 대신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 수도 있다. 굳이 오래되고 낡은 것을 꺼내서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친구를 통해 잔잔한 파문을 만들 것이다. 그 마음엔 선한 것이 흘러가는 생각이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착한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말할 것이다. 나답게 나만의 방식대로 나의 글을 흘려보낼 것이다.
“승부는 정정당당하게 하는 겁니다.
각오하십시오. 페어플레이합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멈추게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끊어 놓고, 분열하게 만든다. 총칼이 없는 데도, 하나둘씩 사람이 죽어 나간다. 살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말았다.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깊이 파고들었다. 이런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일까.
제대로 된 한마디를 하는 것보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게 익숙해졌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줏대 없이 여기저기 흔들린다. 그러니 신념도 없고, 약속도 없다. 나 자신을 지킬 것은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난 일들이다. 누굴 탓할 수가 없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나 하나의 잘못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곧 너다. 너도 곧 나다. 그걸 모른다면 이 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눈이 성하지 않으면 신체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없듯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우리는 함께 지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다.
“제발, 우리 페어플레이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