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노라면 정해진 분량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같은 내용도 넉넉한 제한 아래에서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며 서술합니다. 글자 제한이 빡빡한 경우, 핵심 내용만 간결하게 담기 위해 스타카토를 넣은 악보처럼 메시지를 툭툭 던집니다. 알려주고 싶어도 상대가 궁금해하지 않을 법한 말들은 꾹 삼켜야 합니다. 게다가 자기소개서라는 편지를 읽을 독자는 기업의 인사를 담당하는 아무개이기에 더더욱 조심스럽습니다. 반면 당신께 띄우는 편지를 쓸 적에는 마음이 참 편합니다. 나의 어떤 이야기든 기꺼이 들어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엮어 가는 과정입니다. 한 편의 편지에 사고의 흐름을 담기 위해 적다 보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세어 나갈 때도 많습니다. 무언가 잘 못된 것 같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고쳐볼까 하다 멈춥니다. 그냥 이렇게 보내도 될 것만 같습니다. 합불의 여부를 논하기 위한 편지가 아니니 당신은 그저 제 생각의 흐름에 웃어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편지를 띄울 때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연휴 마지막 날, 끝나가는 휴일을 보내기 싫어 산책을 나섭니다. 근처 아파트 단지를 지나다 작별 인사를 하는 가족을 봤습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겸하여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가나 봅니다. 손자, 손녀에게 인사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표정을 엿보았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워하시는지 그분들의 표정만 보아도 알 것 같습니다. 두 노부부께는 휴일이 끝나가는 아쉬움보다 어여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아쉬울 테지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는 가족을 보며 얼마 전 창원중앙역에서의 인사를 떠올립니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아버지의 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역에서 내리고, 캐리어를 빼며 인사드립니다. 잘 쉬다 간다고, 또 머지않아 오겠다고. 조심히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파이팅 하라고 하십니다. 서울은 제게 전투장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파이팅(Fighting)이 큰 힘이 됩니다. 전투장에서 쉬지 않고 꾸준히 싸워야(Fight)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의 모든 일은 제게 주어진 미션이고, 성실히 또 잘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다 가끔 창원을 가면 참 평화롭습니다. 명절이라 가거나 잠시 쉬러 가는 것이기에 마음도 편하고, 걱정도 없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거니와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인지 푹 잘 수도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마음먹고 늦잠을 자려 해도 9시 이전에 눈을 뜹니다. 전투장에서 한눈파는 장수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나 봅니다. 그러다 평화의 도시에 가면 가끔 10시가 넘어 눈을 뜰 때가 있습니다. ‘아~! 나도 늦잠 잘 줄 아는구나!’ 하며 놀라워합니다. 아무리 술을 먹고 1시, 2시에 자도 5시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는 제가 그보다 일찍 잤는데도 더 오랜 시간 숙면을 취합니다. 집은 집인가 봅니다. 서울에서의 저도 제 자신이지만 창원에서의 저 또한 제 자신입니다.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스스로가 신기합니다.
이렇게 상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페르소나가 있다면 변하지 않는 페르소나도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띄운 편지에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적이 있습니다. 중용 23장에 나온 구절인데 한 영화에서 잘생긴 배우분의 대사에서 알게 된 글귀입니다. 열아홉, 고삼 시절 본 영화에서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러면 나 자신, 타인 그리고 세상까지 바뀐다는 말에 혹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세상은 모르겠고 스스로 변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재수 시절에도 집 떠나 홀로 멀리서 공부하다 머리가 어지러울 때면 몇 번이고 써보며 제 자신을 진정시켰습니다. 다독(多讀)의 효과가 좋았던 터라 지금도 가끔씩 찾아서 한 음절 한 음절 꼭꼭 씹어보며 제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조금은 제게 저 말들이 스며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 힘씁니다. 운동할 때도 최선을 다합니다. 놀 때도 최선을 다합니다. 술은 또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도...... 공부도 아마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무얼 하든 최선을 다하는 제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일부러 가면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거르고 또 걸러보니 하나의 마음이 남습니다. ‘잘 살고 싶다.’라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들을 ‘잘’해내면 ‘잘’사는 것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기에 하는 일들을 ‘잘’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자소서를 쓸 때는 그렇게 쓰는 것이 ‘잘’ 쓰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적절히 끊고, 하고 싶은 말보다는 상대가 듣고 싶을 것 같은 말들을 들려줍니다. 당신께 편지를 쓰노라면 제 감정과 생각을 ‘잘’ 담아내어 봅니다. 어쩌면 읍소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담아냅니다. 당신께 편지를 쓰는 것을 가장한 채 제게 스스로 해주고 싶은 말, 제가 기억해야 하는 순간, 잊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당신께 보내는 월간지요 힘들었고 힘들며 힘들 나를 위로하는 위문편지입니다. ‘잘’ 기록해둔 나의 삶은 오롯이 내 삶이 되어 과거의 나를 위로해 주고 지금의 내게 힘을 주며 미래의 나를 응원할 것입니다. 창원에서는 ‘잘’ 쉬어야만 합니다. 다시 전투장으로 돌아와 싸울 힘을 길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사랑하는 가족들의 응원, 오랜 친구와의 술 한 잔, 느지막한 기상이겠지요. ‘잘’ 쉬고 나면 다시 ‘잘’ 살아갈 힘이 납니다.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결국 ‘잘 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도 ‘잘’ 살기 위해 ‘잘’ 먹고 ‘잘’ 생각하고 ‘잘’ 자려고 합니다. 그렇게 무수한 ‘잘’들이 모여 다(多) 잘 된다면 ‘잘’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