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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맺음('22.10)

다가오는 엔딩

by 영영

다가올 추운 겨울에 살며시 꺼내보기 위해 늦여름의 더위를 남몰래 품으며 가을을 천천히 맞이하는 중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불어오는 찬바람에 온기를 채 붙잡지도 못하고 두꺼운 외투를 꺼내어 보는 10월입니다. 강의실을 가느라 지난해와는 달리 부쩍 잦아진 외출에 바깥 기온을 확인하고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집니다. 비록 조금은 쌀쌀한 날씨지만 이토록 짧게 스치는 가을을 마냥 보낼 수는 없어 산책을 가봅니다.

산책로에는 건강을 위해 손뼉을 치며 걸으시는 어르신부터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함께 웃으며 걷는 연인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는지 짧은 다리를 힘차게 뻗으며 지면을 오롯이 느끼는 아기와 행여나 이 작고 귀엽지만 당찬 존재가 넘어질까 한껏 상체를 낮추고 그들을 쫓는 부모님까지. 또 대학 근처의 산책코스라 저처럼 혼자 나온 대학생들도 많습니다. 저들도 저처럼 우리나라가 여름과 겨울 사이에 또 하나의 계절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나왔을 것이라 짐작하며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중랑천을 따라 걷다 보니 반려동물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게끔 넓게 울타리가 쳐진 공터가 나타납니다. 여러 마리의 강아지들이 주인이 던진 공을 주우러 뛰어가거나, 목줄이 사라진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마냥 달리고 있습니다. 공을 던지는 주인도, 풀어준 목줄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뻐 날뛰는 강아지를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주인도 웃습니다. 뛰어다니는 강아지도 그 모습을 보는 주인도 행복한 것 같습니다.


저는 강아지를 길러본 적이 없습니다. 고양이는 털 알레르기도 있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강아지는 참 귀여워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프로펠러처럼 흔드는 꼬리와 만져 달라고 치근덕대는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납니다. 길러본 적도 없는 강아지이지만 이런 모습들은 이모네 강아지로부터 많이 봤습니다. 곱슬곱슬한 갈색 털로 뒤덮인 푸들 ‘초롱이’. 한때는 저를 상당히 경계했지만 상경하여 이모네 댁에 왕래가 잦아진 이후로는 저를 알아보는지 반겨주기까지 하는 녀석이 어찌나 귀엽던지 만져달라고 치근덕대면 되려 귀찮게 한참 동안 털을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고는 했다지요. 제 강아지도 아닌데 사진도 많이 찍어주었고 이모 댁에서 자는 날이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강아지부터 불러서 한참을 또 놀아주고는 했습니다. 말랑말랑한 살을 만지는 제 손길이 썩 마음에 드는지 배도 까뒤집어 보입니다. 군 입대를 한 뒤 휴가 복귀 전 날에 이모 댁에 갔을 때는 혹시나 너무 오랜만이라 경계하지는 않을지 걱정했는데 똑똑한 녀석은 어김없이 저를 반겨줍니다. 가족도 아닌 제 눈에도 그리 귀엽고 이쁜데 이모네 가족에게는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녀석일지 키워보지 않은 저로서는 가히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요즘처럼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날씨에 외박을 나왔습니다. 이모 댁이 운이 좋게도 위수지역이라 외박 때는 대부분 이모 댁으로 갔습니다. 오랜만의 외박에 설레는 발걸음으로 도착한 집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밖으로 나온 것이 좋았던 저는 귀가와 동시에 채비를 하여 외출을 했고 한참을 놀다 저녁이 되어 이모, 이모부 그리고 형들과 놀기 위해 집으로 왔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놀다 문득 식탁에서 너무 편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우리가 어색해 초롱이의 행방을 여쭈어봅니다. 눈시울이 붉어지십니다. 노쇠하였고, 아팠던 초롱이가 얼마 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합니다. 어쩐지 누군가 집을 들어오면 현관까지 달려와 아는 척을 하고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면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우리 음식에 한껏 흥분한 녀석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기운 없던 애가 하루는 맑은 눈빛과 쌩쌩한 기운으로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지긋이 바라보더랍니다. 마치 사랑으로 자신을 품어준 가족들을 두 눈에 꼭 담으려는 것처럼 짓지도 않고, 달려들지도 않고 바라만 보았답니다. 아프던 와중에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초롱이를 칭찬해 주었는데 그 칭찬이 마지막 칭찬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초롱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또 다른 세계로 갔다고 합니다. 몇 년 전의 일이지만 꼭 바라만 보았다는 초롱이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맴돕니다.


치매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치매 환자의 이야기만 담은 것이 아니라 어느 의사 선생님께서 당신께 있었던 일들을 엮은 책이었지요.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기억에 남는 일화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이 어느 날 진료를 받으러 와서는 치매가 찾아오기 전의 일화를 선생님께 이야기하며 그때 참 좋았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조차 가물가물해진 기억의 일화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 노인분은 누가 봐도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분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신 노인분은 그렇게 마지막 진료를 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기운을 내신 것일까요? 본능적으로 마지막 진료가 될 것 같았는지 아픈 모습이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게 잠시 알츠하이머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나 봅니다. 신기했습니다. 초롱이도 그 노인도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꼭 담고, 평소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얼마 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머지않아 본인이 어떤 대상과 이별을 할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대상이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닌데도 그렇게 다가오는 이별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초롱이가 생각나고 책에서 읽은 노인이 생각나더니 위의 시가 떠오릅니다.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을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손뼉 칠 때 떠나라’는 격언이 있지만 사람의 욕심은 그 박수가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아 쉽사리 못 떠나고 미련을 두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잘 알고 떠난다면 그 결단력이 제법 멋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이 시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전까지 스포츠 스타의 은퇴 정도의 ‘떠나야 할 때’를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누군가의 죽음, 어떤 대상과의 작별 등이 떠오릅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한 울림을 전해옵니다. ‘낙화’ 뒤에는 ‘열매’가 맺힐 것이고 그 열매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일 것이며 다시 봄이 온다면 꽃이 필 것이기에 이 ‘낙화’는 ‘잠깐의 이별’일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낙화’가 일시적이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이별이 아닌 기약 없는 이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내 영혼의 눈’이 ‘성숙’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깁니다.

모든 끝맺음에는 나름의 슬픔을 품고 있다고 하는데1), 그저 슬픈 감정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숙할 수 있는 존재일까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간 많은 존재들과 해온 작별이 조금이라도 나를 성장시켰을지 혼자 생각해 봅니다. 덤덤해진 헤어짐과 끝맺음도 있지만 아직 안녕을 고하는 순간에 성숙하게 이별하겠다는 생각이 들 여지조차 주지 않고 마음속 감정의 응어리가 진동하는 순간과 대상이 있습니다. ‘영혼’이 ‘성숙’해질 여지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또 헤어짐과 작별에 슬픔과 미련, 아쉬움 따위가 없을 수 없다며 나의 ‘미성숙함’을 두둔해 줍니다. 어리석은 저로서는 모든 일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저만의 타당성을 부여해 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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