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아직 해가 뜨기 전입니다. 해가 길어져 일찍 해가 뜨는 요즘임에도 이렇게 어두운 시간부터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평소라면 반갑지 않을 이른 기상이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외출을 준비합니다. 오랜만의 봄나들이에 들떴습니다. 매주 서울과 대전을 오가는 나들이 아닌 나들이를 하느라 장거리 이동이 잦지만 그들은 모두 설레는 이동이 아닙니다. 설레는 마음 가득 안고 기차에 몸을 싣습니다. 세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어느 남쪽의 조용한 마을. 벚꽃은 한바탕 만개하였다 이제는 아름다운 낙화를 하고 있습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봄나들이지만 기온이 제법 쌀쌀합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는 막연히 4월 초중순이니 날씨가 따뜻할 것이라 추측하였습니다. 하지만 출발 일주일 전 확인한 일기예보는 제 희망찬 예측에 비웃음이라도 날리듯 반갑지만은 않은 예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여행 첫날 낮부터 비가 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라청’이라는 속상한 별명도 가지고 있으니... 혹시 이번에는 기상청이 실수하기를 바라며 희망의 끈을 아주 놓지 않고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여행지에 도착하여 올려다 본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아무래도 제 희망의 끈은 이제 놓아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행, 소풍 이런 날 날씨가 좋다면 그날은 내가 ‘날씨 요정’입니다. 다행히 비가 와도 ‘날씨 악마’와 같은 짓궂은 수식어가 따라붙지는 않습니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악마라는 수식어까지 붙기엔 가혹했나 봅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여행 동안 무엇을 하면 좋을지 제법 공들여 찾아봤습니다. 노는 것에 진심인 자로서 행복한 여행을 만들기 위해 맛집도 알아보고 맛있는 디저트가 있는 카페도 검색합니다. 어느 정도의 굵직한 계획은 세워두고 출발한 여행이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합니다. 비 오는 날씨도 물론 좋습니다. 비 내리는 날에만 들을 수 있는 빗소리, 풍경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그 모습들을 보노라면 그 언젠가 있었던 또 다른 비 오는 날이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시절 비가 오는 날 챙겨간 우산이 거센 바람에 망가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다며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비를 맞으며 친구들과 장난친 날이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날은 자취방에서 추적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아주 살짝 열어두고 그 운치를 즐기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을 아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의 여행은 득보다는 실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예쁜 풍경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이 어렵습니다. 숙소로 가는 길, 유채꽃밭이 있습니다. 유채꽃밭이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리 예쁘게 피어있는 꽃을 보니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앞 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빗물 자국의 지름이 제법 큽니다. 그리고 와이퍼도 제법 빠르게 움직입니다. 이래서는 잠시 내려서 사진 찍을 수가 없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갑니다.
사진은 포기했지만 맛있는 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비가 오기 전 사실은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아침부터 영업하시는 치킨집으로 가 치킨을 픽업하였습니다. 고소한 튀김 냄새를 못 이기고 먹어본 한입은 얼른 숙소에 가 한잔하며 치킨을 열심히 먹을 시간을 기다리게 합니다. 치킨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을 추가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바닷가에 온 만큼 회를 떠올립니다. 이럴 때는 비가 대수롭지 않습니다. 잠시 맞더라도 툴툴 털면 되니까요. 비를 뚫고 회까지 포장하였습니다. 바늘 가는 곳에 실이 가야 합니다. 여행에 술 한 잔이 빠져서야 되겠냐는 생각으로 술도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한 종류만 먹기엔 아쉬워 어떤 것을 시도하면 좋을지 고심했습니다. 어쩌면 음식보다 더 고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지역마다 막걸리 특산품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지역 양조장, 만드시는 막걸리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대단한 할머니께서 반기십니다. 어디서 여행 왔냐는 질문에 서울에서 왔다고 말씀드리자 멀리서 온 저희가 보기 좋으셨는지 지긋이 웃으십니다. 그리고 또 회에 와인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여 와인도 샀습니다. 이쯤 되면 맛있는 술 한잔하기 위해 여행은 이용당한 것이 아닌가 하며 웃습니다. 술자리가 무르익습니다. 바깥에는 아직 비가 오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서울 기준으로 1년에 강수일수가 105일 내외입니다. 지역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이 수치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1년에 여행을 몇 번 가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가도 12번인데 그렇게 자주 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 중 비가 오는 날은 1/3이 안 되는데 그날에 하필 제가 여행을 한다는 것이 행운일지 비운일지 생각해 봅니다. 하필 고르고 고른 날이 비 오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비운입니다. 하지만 다들 화창한 날씨의 여행을 선호하기에 그런 날씨에 하는 여행은 여행객들로 북적일 것이기에 비 오는 날의 여유와 운치 있는 여행을 생각하면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시간도 낼 수 있었고 여행을 올 마음의 여유도 있었으니 행운이 깃든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술자리를 정리합니다. 마무리 되어가는 술자리를 알아차린 듯 빗소리도 점차 작아지고 이제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옵니다. 그렇게 언젠가 비 오는 날 떠올릴 추억 하나가 더 생깁니다.
비가 언제 왔었냐는 듯 하늘이 맑습니다. 하늘이 그야말로 깨끗합니다. 비 온 뒤 맑은 날은 전날 먹구름을 보여준 것이 미안하여 사과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퇴실 후 미리 찾아본 카페로 이동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로 바로 가지 않습니다. 네비게이션이 경로를 다시 찾자 왜 안내하는 대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잠시 갈 곳이 있다며 안내합니다. 어제의 유채꽃밭입니다. 이미 몇몇 분들이 사진을 찍고 계십니다. 저들도 어제의 비로 아쉬움을 삼켰나 봅니다.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릅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늘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몇 장 찍어봅니다. 비가 그치고 나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옵니다. 휘날리는 머릿 가지를 정리하고 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잠시 후 더 예쁘게 핀 유채꽃들이 가득한 꽃밭을 지납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습니다. 비가 온 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꽃들과 찍은 사진은 부끄럽지만 용기 낸 티가 역력합니다. 이렇게 비 온 날과 비 온 뒤 다음날까지의 추억이 하나 생깁니다.
4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정말 한 달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사 일, 시험 그리고 청춘까지 다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챙기려고 한 것들을 다 잘 챙겼는지 그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또 한 달을 마무리하고 5월의 연휴를 즐기려고 합니다. 5월 초 남쪽으로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여행 첫날에 비가 온다고 합니다. 고르고 고른 여행 날에 비가 오는 행운을 두 번 연속으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간절히 바라는 곳으로 행운이 좀 더 깃들면 좋겠는데 행운이 다가오다 살짝 삐끗했나 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또 하나의 비가 선물하는 추억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유채꽃밭이 그랬듯 또 다른 예쁨과 반가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