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소설을 좋아합니다. 단편소설도 재밌지만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일화를 이야기하는 대하소설을 꽤 좋아합니다. 영화도 좋아합니다. 단편 영화도 좋아하고 속편이 있는 영화도 참 좋아합니다. 또 드라마도 좋아합니다. 대하소설, 속편이 있는 영화 그리고 드라마. 아마 이들은 모두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보다 깊게 알 수 있기에 매력적일 것입니다. 물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감정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다양한 사건을 알 수 있습니다. 제법 매력적인 그들에게도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면 공허하다는 점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덮는 그 순간 그들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이 맴돕니다. 아직 그들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그들을 쉬이 보내주지 않습니다. 해피엔딩이면 해피엔딩인 대로 마지막 장 이후 그들의 삶에 대해 그려봅니다. 새드엔딩이라면 새드엔딩인대로 또 그들은 그 후로 어떻게 됐을지 혼자 상상합니다. 그리고 해피와 새드의 여부와 상관없이 제가 원하는 엔딩도 한번 떠올립니다. 그렇게 작가나 감독이 닫힌 결말로 만든 작품들을 저는 닫지 않고 열어 둡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세대에 걸친 얘기들을 그렇게 곱씹어 보고 난 후에야 저는 저만의 책장을 덮고 엔딩크레딧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서 떠나보낸 주인공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제서야 그들을 보내는 데 있어 먹먹한 마음이 덜 들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서 보낸 주인공들이 많아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점점 더 제 삶의 스토리가 그들 못지않게 풍성해져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제 삶이 바쁘다 보니 그들에 대해 곱씹을 틈도 없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저는 이야기 속 인물들과의 이별이 조금은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습니다.
한때 장안의 화제였던 만화가 있습니다. 아마 고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나온 것 같은데 그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만화라고 평이 자자했습니다. 저도 1화의 10분 정도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되게 재밌고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그때는 제게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에 ‘나중에 수능이 끝나면 할 무언가’로 남겨두었습니다. 이 ‘나중에 수능이 끝나면 할 무언가’에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수능이 끝나고 그중 실제로 한 것은 몇 개 없습니다. 수능을 두 번이나 봤기에 미뤄왔던 일들을 처리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막상 언제든 할 수 있을 때가 되가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렇게 그 만화는 한 번 더 진화하여 ‘언젠가 한 번쯤 할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한 단계 진화한 ‘만화 보기’는 안타깝게도 우선순위에서 자꾸만 밀려났습니다. 노는 것을 참 좋아하는 저에게 놀거리들이 자꾸 늘어난 것입니다. 이렇게도 놀아보고 저렇게도 놀아보다 보니 결국 ‘만화 보기’는 까맣게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밤을 새워가며 봤다는 그 만화가 제게는 잊히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나 봅니다. 예상치 못하게 만화는 근 10년의 기간을 두고 제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최근 극장에서 그 만화의 영화판이 개봉하였는데 특수 장비가 설치된 관에서 그 영화를 보면 몰입감과 흥미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특수장비가 설치된 영화관이 서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보통 영화를 볼 때 예고편도 잘 보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보려는 영화는 앞의 내용을 하나도 모른다면 오히려 집중이 어려울 수 있다고 합니다. 유튜브에 요약본 영상도 있습니다. 그 영상이라도 보면 어떠냐고 제안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부족하여도 편법(?)을 쓰는 것은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봤던 고전을 만화로 풀어낸 책에서 ‘군자대로행’ 이라는 말을 괜히 떠올립니다. 이 상황에 적절한지 잘 모르겠지만 역시 이현령비현령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합니다. 비록 군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모른다 하여 샛길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바로 난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한 분께 어디 정도까지 봐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볼 수 있을 만큼만 보고 오라고 합니다. 처음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보고 가는 것이 아예 보지 않고 가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편 두 편 보기 시작합니다. 무엇이든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한두 편 보다 보니 이제는 제가 안달이 납니다. 학창 시절에도 유독 시험 기간에 우연히 펼친 책이 너무 재밌어 단숨에 읽어버린 적이 많습니다. 시험 기간이라는 부담되는 상황 속에서 머리를 환기할 수 있는 장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사 생활로 피곤한 제게 이 만화는 신선한 재미와 일상의 변주를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처음 볼 때 밤을 새우고 양치하는 시간마저도 만화에 집중했다는, 표를 구했다는 말에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던, 영화 보는 날을 너무나 기다리고 있는 친구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저도 자야 하는 시간에 잠을 한 시간 양보하며 몇 화를 내리봤고 1배속은 너무 느린 것 같아 2배속으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쫓아갔더니 전부는 아니지만 친구가 놀랄 만큼의 만화를 보고 영화관에 갔습니다. 특수관에서 보기를 너무 잘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제가 보지 못했던 부분의 이야기 흐름을 전혀 모르다 보니 한 장면 한 장면 집중하며 내용적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말이지 집중해서 재밌게 영화를 보았고 특수장비의 통통 튀는 매력도 만끽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 문득 또 한 명의 주인공을 보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 주인공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내줘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단순한 만화라고 생각했었는데 주인공들의 과거, 권력자들의 정치적 욕망 그리고 개개인의 내면 성장 등 너무 풍성한 내용들이 숨어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친구에게 이렇게 재밌는 만화를 왜 이제야 알려줬냐고 농담을 던집니다. 그리고 너무 재밌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영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지속적으로 찾아왔고 선택에 따른 결과가 후회로 이어지더라도 그들은 그 속에서 또 성장하지 않았겠냐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냐며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중간에 다 보지 못 한 부분도 차차 시간을 들여 보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문득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어쩌면 영화는 끝이 났지만 저는 주인공들과 작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독서나 영화 감상이 취미라고 하는 분들과 얘기하게 되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영화를 감명 깊게 봤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나 좋아하는 것들이 나와 겹친다면 그 내용을 주제로 한참을 떠들 수 있습니다. 그 책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액션 영화여도 좋고 로맨스 영화여도 좋습니다. 관심사의 교집합을 발견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서로의 생각을 편히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저는 좋아하는 분들과 서로의 경험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일 년에 두 세 번 뵈러가는 제 멘토님께도 한참 술 먹다 문득 질문을 툭 던지고는 합니다. 혹시 어떠한 책을 읽으신 적이 있으신지, 읽으셨다면 어떤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견을 여쭙습니다. 자주 오지도 못하는 녀석이 간만에 나타나더니 술 먹다 말고 갑자기 뜬금없는 궁금증을 툭 던집니다. 그럼에도 역시나 멘토님은 그런 저를 귀찮아하시지 않고 당신의 생각을 제게 나눠 주십니다. 또 종종 삶의 이런저런 고민을 함께 나누는 혈육에게도 신문 기사, 책 혹은 영화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육아 중이라 바쁘시기에 연락의 빈도가 많이 줄었지만 가끔 나누는 대화는 대체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제가 만화의 세계에 빠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신 친구와도 이전에 봤던 영화나 어떠한 세상 소식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습니다. 또 하루는 재밌게 읽은 책을 묻더니 서점에 갔던 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읽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부분에 대해 생각을, 삶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선물하며 저 또한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고 그것들을 더 많이 나눠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책에 대해, 영화에 대해, 또 세상 사는 것에 대하여 대화하며 주인공들과 이별하고 그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그 주인공의 생각 혹은 삶을 제게 초대하는 것은 아닌지. 혼자 읽고 보았던 것들이었기에 혼자 생각하고 소화하고 매듭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와 생각을 나누며 서로의 소화를 돕고 매듭을 지어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엮어 나가는 중일 것 같습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하기에 떠나보내기보다는 그것들을 더 저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더 많은 주인공을 만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별의 대상이 아니라 더욱더 제 삶에 초대하는 손님이기 때문입니다. 공허함은 줄어들고 설렘이 자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