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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있는 회피('25.11)

내가 나를 위로하는.

by 영영

“점심에 같이 불백 어때요? 요 밑에 괜찮은 집 있는데.”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기에는 빠르게 식사할 수 있는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먹을 수만 있으면 얼른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긴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잠시라도 눈 붙이기에 바빴습니다. 현장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다소 경직된 듯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날에는 눈이라도 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눈과 머리를 식혀줘야만 9시 10시까지 지속되는 업무를 감당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점심시간을 얼마나 세이브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샐러드, 김밥, 샌드위치 등 최대한 간단한 식사로 한 끼를 해결하고 자리에 앉아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했습니다. 그래도 이번 달은 잠시 여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언제 야근의 행렬이 이어질지 모르나 지금을 즐기기로 합니다. 그래서 미뤄왔던 같은 팀의 후배와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본사 근처에 아는 식당이 몇 없지만 저 불백집은 팀에 처음 왔을 때 옆 파트 선배가 환영의 의미로 데려간 식당입니다. 당시 가격도 괜찮고 음식도 제법 맛있어 언젠가 재방문해야겠다 생각한 곳입니다. 다만, 몇 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기에 바쁘시기에는 잠을 위해 1분도 아쉬운 점심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유가 조금 생긴 만큼 맘 편히 가보기로 합니다. 예약은 안 되는 곳이라 잽싸게 점심시간에 나가자고 결의를 다집니다.


"이 숫자가 맞는건가?" 평온한 오전을 얼어붙게 만드는데는 누군가의 이 한 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이 숫자가 맞냐는 질문. 사실 이 팀에서 가장 무서운 질문입니다. 숫자의 정확성이 그 어디보다 중요한 팀입니다. 혼자만 보는 자료라면 약간의 실수를 눈 감아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니까요. 하지만 이 숫자는 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숫자가 회사 내 높으신 분을 넘어 그룹에서 높으신 분께도 보고되는 숫자입니다. 그야말로 나의 사소한 날개짓이 거대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두개의 숫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팀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수치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고 조금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만들어져 보고가 끝난 숫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후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후배는 고군분투하였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파일을 확인했고 선배들과 팀장님은 어떻게 대처할지 논의하였습니다. 다행히 해결할 수 있는 범위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점심시간 30분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기에 점심은 함께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후배는 점심시간이 되자 먼저 식사를 하고 오라며 미안하다고 합니다.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혼자 밖으로 나갈까 하다 이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까무잡잡한 후배의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후배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팀에는 나보다 반년 가까이 빨리 왔지만 세 살 어린 회사 그리고 학교 후배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친구라 분명 점심시간 내내 자책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실한 친구라 밥도 안 먹고 쉬지 않고 원인 분석을 할 것입니다. 물론 빠른 일 처리가 중요하지만 지금은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괜찮으니 할 것들을 마무리하고 같이 나가보자고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기다림이 그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부담이라도 줘서 이 친구의 허파에 신선한 공기를 좀 넣어줘야겠습니다.

불백집은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빠르게 식사만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꽤 맛있지만 왜인지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은 식당으로 갑니다. 주문하고 후배에게 괜찮냐고 물어봅니다. 괜찮을 리가 없습니다. 다행히 해결 가능한 상황이지만 실수했다는 그 자체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친구의 흔들린 멘탈을 잡아줘야 할지 고민합니다.


사건은 이러했습니다. 연말 보고가 다가오며 평소에 자주 쓰지 않던 숫자를 보고해야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자주 쓰지는 않지만 그 숫자를 구하는 과정은 이미 구현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신한 원본자료를 우리의 입맛에 바꾸는 과정의 중간에 그들이 원하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간 과정의 숫자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늘 결괏값만 사용했고 그 결괏값은 제대로 된 숫자였기에 중간과정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간 이상없는 결괏값을 열심히 써왔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현명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만회가능한 상황이지만 그간 이 문제를 모르고 결괏값만 사용했던 것을 후배는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이해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후배의 마음도 이해됩니다. 과거의 중간값에도 그 오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숫자는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기에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숫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누군가 그 중간값에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자 그 숫자는 ‘꽃’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꽃’은 독소를 가진 꽃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꽃에 독소가 들어있는줄 몰랐었고 심지어 그 꽃을 사용할 뻔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몸짓’에 불과했기에 독소가 있던 없던 무관했지만 ’꽃‘이 된 이상 독소는 인지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랬기에 하필 ‘꽃’으로 불러본 그 후배가 걸린 것입니다.

운이 나쁘다고 해야할지, 지금이라도 발견하였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후배의 잘못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사회생활 속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귀책이 후배에게 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같은 잣대로 후배를 대하기에는 이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저는 그 책임감을 조금 덜어주기로 했습니다. 그저 ’그럴 수 있다, 다 너의 잘못은 아니다, 이제라도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군대도 그랬지만 발견한 놈만 독박 쓰는 거다‘와 같은 말들로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후배는 쉬이 그 마음의 짐을 덜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역시 업무를 하며 책임감이 있는 친구인 것 같다는 저의 느낌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접근방식을 이용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 그리고 앞으로 꼼꼼히 보면 된다.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야겠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본인을 위로해줘라. 그래야 멘탈적으로 버틸 수 있다.‘고 또 하나의 마음을 전합니다. 과연 이 말들이 후배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다행히 식사하고 난 후배는 그래도 덕분에 조금이라도 멘탈을 회복했다고 고맙다고 합니다. 사실 밥 먹는 20분 만에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났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옆에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몇 분씩이나 한 선배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선 잔소리의 대가로 밥을 샀습니다. 원래도 얻어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잔소리 들어줘서 고맙다고 저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밥을 사줄 수 있는 명분을 더욱 공고히 하고 계산했습니다. 가는 길에 커피를 사겠다고 하자 그러지 말라고 오늘은 나만 살 테니 다음에 커피를 한잔하자 말하고 얼른 사무실로 왔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더 말했습니다. 스스로 잘 위로해 주고 오후 힘내보자고. 대단한 위로가 되지는 않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후배의 마음이 편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후를 보냅니다.


사실 후배에게 해 준 말은 저 스스로 자주 사용하는 멘탈 관리법입니다. 첫 수능에서 미끄러졌을 때도, 준비하던 고시 공부를 낙방했을 때도, 지원한 수많은 회사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때마다 저는 그 상황을 제 탓으로만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를 얻은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는데 굳이 자발적으로 힘듦 한 숟가락을 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슬프고 힘든 상황 속 연약해진 제 멘탈을 더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책임감 없이 남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나간 일들에서 의미를 잘 찾아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또 한 번 힘을 내어 새로운 길로 나아가거나 혹은 버티고 또 버티며 또 다른 미래가 찾아올 것을 대비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이니 내가 책임감 있게 대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탓만 하면 모든 게 정말 내 잘못이 되는 느낌이니 그 느낌을 ‘회피’한 것입니다. 감히 이 회피를 ‘책임감 있는 회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모순되는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학에서의 시적 허용과 같이 비문학과 같은 인생사에서 문학적 표현법으로 인간적인 따스함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문학에서나 나올 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듯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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