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 직장을 다닐 때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남산 공원을 산책했다.
배도 부르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에 기분이 들떴다.
꽃을 좋아하게 되면 나이가 든 것이라고 하던데,
그즈음 막 서른을 넘긴 나는 꽃에 관심이 가기 시작해서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면 사진을 찍고 꽃 이름도 검색해 보며 자주 감탄사를 내뱉곤 했다.
그날도 연신 휴대폰 카메라로 꽃 사진을 찍으며 “어머, 꽃 너무 예쁘다.”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동료가 “왜 오버하고 그래요?”라고 말해 순간 무안해졌다.
그 동료는 내가 만만해 보여서인지
평소에도 자주 장난을 치곤 했는데,
나는 장난이라는 말로 포장한 무례함이 불쾌했지만
오히려 화를 내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로 몰아갔기에
모두가 웃어넘기는 분위기 속에서 그날도 마지못해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불쾌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누그러들었지만
그날 이후로 길가를 지나며 꽃을 볼 때마다 어쩐지 이전처럼 설레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관심에서 멀어지니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 회사를 관두고 한참 고민이 많았던 시기,
푸르스름한 새벽녘까지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어느 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는 대신 산책을 나섰다.
이른 새벽 찬바람도 걷다 보면 시원하게 느껴졌다.
거리며, 건물마다 빛을 잃은 서늘한 풍경들은 서서히 떠오르는 햇빛에 제각기 색을 찾아갔다.
햇빛이 잘 드는 쪽을 향해 보도를 침범한 나뭇잎들이 나풀거렸다.
거친 아스팔트 사이에서나,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한적한 길가의 어느 곳에서라도
온몸으로 힘차게 피어오른 꽃들을 보니 기특하고 고마웠다.
“너무 예쁘다.” 아무도 듣지 않는 길가에 서서 그렇게 한 마디를 내뱉고 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사하고 벅찬 기분이 느껴졌다.
바람에 살랑대는 밝고 고운 빛깔에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행복이 밀려왔다.
꽃잎을 살짝 매만져보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검색창에 꽃 이름을 검색해 보고,
나지막이 꽃 이름을 불러보며
다시 또 어느 길 위에서 그 꽃을 만나면 ‘개망초다’, ‘금계국이다’ 하며 알은체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 속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것이 높은 지혜에서 온 것이건, 아주 단순한 천진함에 불과한 것이건, 그렇게 순간을 사는 법을 아는 사람, 그렇게 현재에 살며 상냥하고 주의 깊게 길가의 작은 꽃 하나하나를, 순간의 작은 유희적 가치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상처를 줄 수 없는 법이다.’
이 문장을 발견하고선 비로소 그때의 상처를 흘려보내게 되었다.
어느 새벽 길가에서
나는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주름이 깊은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며 감동하고 기뻐하며
'너무 어여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