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께로.
사박사박 감빛 낙엽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는 계절이 찾아오면 발길은 자연스레 뜨끈한 국밥집으로 향한다. 나는 돼지 국밥, 순대 국밥, 콩나물 국밥, 굴 국밥 맛집을 찾아서 보약을 먹듯이 국밥을 챙겨 먹으며 가을, 겨울을 난다. 국밥의 카테고리 안에서도 내가 간절하게 찾게 되는 보약은 친정 엄마가 한 솥 끓여주시는 얼큰하고 칼칼한 시뻘건 경상도식 소고기 국밥이다. 엄마의 소고기 국밥이 더욱 생각나는 소슬한 계절이 왔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친정집의 명절 밥상은 제사 음식 대신 엄마의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진다. 엄마는 타지에서 오랜만에 찾아오는 귀한 자식들에게 무얼 해먹일까 고민하시지만 매번 온 가족이 기다리는 음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단연코 엄마의 경상도식 소고깃국이었다. 친정집에는 언제나 엄마의 정성스러운 손맛 가득한 소고깃국 밥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댁을 다녀온 우리 자매는 엄마의 매운 소고기 국밥을 한 그릇 뚝딱 먹으며 기름진 속을 뚫었다. 친정에 와서 배도 마음도 채워졌으니 무장을 해제하고 엄마 앞에서 누울 자리를 알고 두 다리를 뻗는다. 그리고 엄마가 며칠은 먹을 수 있게 싸주신 소고깃국을 두둑이 챙겨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가구 공장으로 생계를 이으시며 우리 삼 남매를 키우셨다. 엄마는 공장 일도 하시고 혼자서 우리 식구들과 공장의 기숙사 직원들의 매 끼니 음식을 만드셔야 했다. 건더기 많은 뜨끈한 한 그릇 국과 흰쌀밥에 곁들인 잘 익은 김치가 바쁘고 고단했던 엄마가 마련한 최선의 정성스러운 밥상이었다.
엄마가 빨간 소고깃국을 한솥 끓여 놓으시면 우리 삼 남매는 하교 후 집에 돌아와 각자 큰 그릇에 흰쌀밥을 담고 그 위에 김이 펄펄 나는 뜨끈한 소고깃국을 넘치게 담았다. 취향껏 한입 가득 차는 큰 소고기 덩어리, 대파, 숙주나물, 우거지, 무 등 모든 나물을 산 쌓듯이 올리고 그 위에 깊이 우러난 빨간 국물을 부어 잘 익은 김장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밖에서 애쓰느라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바쁘신 엄마가 곁에 없어도 엄마의 따뜻한 가슴팍에 푹 안긴 듯 가슴이 뜨겁고 넉넉히 땀이 났다. 허기진 배와 어린 영혼이 엄마의 온기로 충족되는 것 같았다. 우리 삼 남매가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은 엄마의 집보약 덕분이었다.
바람이 서늘한 늦가을에 아이를 출산하며 나에게 엄마의 소고깃국은 더욱 간절해졌다. 친정 엄마는 혼자 아기를 보며 몸조리를 하고 있을 딸을 만나기 위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새벽 첫 차에 몸을 싣고, 큰 솥을 싣고 포항으로 오셨다. 그 큰 솥 안에는 딸이 간청하여 지난밤에 정성 들여 끓이신 소고깃국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미역국을 저리 밀쳐두고 얼큰하고 파향 가득한 소고기와 나물을 입안 가득히 넣었다. 곧바로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뜨거운 새빨간 피가 온몸을 감싸도는 것 같았다. 노폐물이 빠지듯이 땀이 나고 아대를 찬 손목에 힘이 생겼다. 엄마는 기력이 없고 육아로 고군분투하는 딸을 위해 냉동실에 소고깃국을 소분하여 넉넉히 넣어두시고 늦은 밤 무거운 발걸음으로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냉동실에 든든하게 쟁여놓은 소고깃국은 엄마가 고생하는 딸 몸보신하라고 지어주신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약과 같았다. 내 몸이 아파서 서러울 때나 우는 아이를 달랠 방법을 몰라 엄마가 문득 보고 싶을 때 그것을 냉동실에서 꺼내어 뜨겁게 데워먹으면 거뜬히 힘이 나고 속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엄마의 보약만큼 나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은 없었다.
조만간 아들의 생일과 친정아버지 음력 생신이 맞물려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간다. 추석 이후로 오래간만의 친정 방문이다. 엄마는 이미 소고깃국을 두 솥 끓여 언니네와 우리 집에 나눠주실 계획이시다. 국을 담을 큰 통도 두 개나 사다 놓으셨다고 한다.
엄마의 연세도 곧 일흔이시니 "엄마! 힘들게 요리하시지 말고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자!" 이런 딸의 간청에도 엄마는 미역국도 끓이고 소고깃국도 끓이신단다. 소고깃국은 그만 끓여도 된다는 말은 차마 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엄마께 소고깃국 끓이는 법을 여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분명 만드는 법을 몇 번이나 알려주셨을 텐데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엄마를 만나러 가면 항상 그렇듯이 김이 모락 나는 소고깃국이 밥상에 올려져 있을 것 같아서다. 그 귀한 보약을 차리며 엄마가 우리를 기다리실 것 같아서다.
엄마의 소고깃국을 꽁꽁 얼려서 냉동고 한가득 쟁여두고 내 남은 평생의 보약으로 하나씩 꺼내 먹을 수는 없을까? 그 생각을 하니 벌써 코끝이 시큰하고 아리다. 그 보약이 다 녹아 없어지는 순간, 엄마가 없는 세상이 현실로 다가와 나의 일상과 나의 기댈 곳이 와르르 녹아 무너져 버릴까 두렵다.
나는 이 추운 계절을 거뜬히 나기 위해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보약을 듬뿍 받아올 작정이다. 냉동실에 얼려놓은 보약을 녹여 챙겨 먹으며 우리 엄마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안정감과 위로와 사랑을 온전히 누릴 것이다. 지금은 엄마가 지어주시는 얼큰하고 시뻘건 소고기 국밥이 간절한 소슬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