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지위가 나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켰을 때

by 심연온

“저는 이제 살 가치가 없어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는 절망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때 성공한 사업가였다. 회사를 키웠고, 사람을 고용했고, 이름이 적힌 명함을 내밀며 살았다.

그러나 여러 불운이 겹쳤다. 사업은 무너졌고, 사업이 무너지자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홀로 남은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몇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그는 “살아보겠다”고 말하며 다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찾는 곳은 없었다. 그는 일용직을 전전했다.

평생 쌓아 올린 전문성과 경력은 허공에서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물었다.


“이런 상태로도… 그냥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순간 나는,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실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의식했다.

지위를 잃지 않은 내가, 과연 지위를 잃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너무 무책임한 위로는 아닐까.

진료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아무쪼록 살아갈 힘을 얻어 다음 진료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나는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위는 곧 존재 가치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얼마를 벌어들이는지,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사라진다.

지위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을 잃는 일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언어를 잃는 일이다.


그래서 추락한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너는 어떤 존재인가.




장자는 인간의 존재를 “쓸모 없는 나무”에 비유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는 가장 먼저 베어진다. 집을 짓고, 도구를 만들고,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뚤고 옹이가 많아 아무 데도 쓸 수 없다고 평가받은 나무는 베이지 않는다.

그 나무는 오래 살아남아 산 전체에 그늘을 만든다.

쓸모없다는 이유로 가장 오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은 비뚤고, 비효율적이고, 쓸모없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오래 남고,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말한다.


더 유용해져라.
더 효율적이어라.
더 생산적이어라.


존재는 성과로 번역되고, 사람은 기능으로 환산된다.


그러나 장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듯 하다.


살아 있어라.
그 자체로 충분하다.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아직 숨 쉬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너무 오래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자신을 설명해왔다.


그러나 언젠가 누구든 묻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때도 여전히 존재라고 불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잘 사는 법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자신과 함께 평화로이 존재하는 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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