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과 프리모 레비 사이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트라우마를 경험한 환자들은 때때로 이렇게 묻는다. 이 질문에는 하나의 중요한 서사가 담겨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피고인석에 앉히고, 고통이라는 벌의 이유를 묻는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나?
그래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인가?
사람들은 저마다 고통의 이유를 찾아가며, 고통에 대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간다.
고통의 의미와 서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빅터 프랭클이다.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우상에 가깝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의미를 지켜낸 사람.
고통 속에서도 태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
그의 말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 속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다. 단 한 가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많은 치료자들이 이 문장에서 위안을 얻는다. 환자들의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 헤매는 환자들을 돕는 우리의 일이 헛되지 않다는 증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빅터 프랭클이 아니다.
그들은 의미를 만들지 못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무너졌고, 그 결과 의미를 만들 힘을 잃은 사람들이다.
자신을 지탱하던 서사가 부서지고,
시간의 감각이 끊어지고,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들.
그들에게 “그래도 의미를 찾아보자”는 말은 종종 이렇게 들린다.
당신은 아직 충분히 잘 견디지 못했다.
당신은 아직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
당신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 말은 고통 위에 또 하나의 평가를 얹는다.
한편 프리모 레비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여기에는 왜가 없다.”
(Hier ist kein Warum)
아우슈비츠의 고통은 교훈도 아니고, 성장도 아니며, 구원의 재료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설계된 체계였고, 인간이 삶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장소였다.
레비에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가해자의 폭력을 희석시키고, 피해자를 다시 침묵시키는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은 설명되는 순간, 피해자에게 모욕이 된다.
“의미 있는 고통”이라는 말에는 숨은 구조가 있다.
의미를 만들어낸 피해자는 더 성숙한 인간이고,
끝내 무너져버린 피해자는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는 구조다.
고통은 어느새 업적이 되고,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잘 견뎠는가”로 측정된다.
그 순간 피해자는 단지 고통받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잘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분노해서는 안 되고, 절망해서도 안 되며, 무너졌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의미 있는 고통의 주인공”으로서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엄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벗을 수 없는 도덕적 갑옷을 입히는 일이다. 무겁고, 숨 막히고, 벗으면 죄책감이 따라오는 갑옷 말이다.
나는 진료실에서 점점 확신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아무 의미도 없다. 교훈도 없고, 목적도 없고,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때로는 가장 치료적인 문장이 된다.
“이 일이 벌어진 데에는 이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아닙니다.”
이 문장들은 고통에 의미를 주지 않는 대신, 그들의 책임을 거둬간다.
어쩌면 치유는 고통의 의미를 만드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우연한 고통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나도 고통의 예외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잘 살아낸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존재도 아니다.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존재다.
그 인식의 자리에 서게 되면,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조건 위에 놓인 인간의 사건이 된다.
그래서 연대는 비슷한 경험에서 생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인간이라면 우연히 고통받고, 부서질 수 있다는 공유된 취약성에서 생긴다.
빅터 프랭클은 위대한 생존자였다.
그러나 위대한 생존자가 곧 보통 인간의 모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그는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이 일, 이 무력한 직업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들 대부분, 아니 인간의 대부분은 프리모 레비 쪽에 더 가깝다.
의미를 만들지 못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인해 부서져버렸기 때문에 의미를 만들 수 없게 된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고통의 무고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지 않는다.
어떤 고통은 삶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의 영역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남긴다.
그리고 어쩌면 치유는, 그러한 인간의 연약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