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람의 물결이 흥청대는 대전 시내 한복판.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소란스럽고 나뜬 마음이 한 계단 내려앉은 듯 차분해진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몇십여 분이 남았다. 나와 다른 세계에 속한 문장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길 바라며 낯선 제목을 손끝으로 훑어본다. 환한 햇살 사이로 반짝 떠도는 책 먼지가 정겹다. 그저 시간을 때울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친구가 다가오는 것도 모를 만큼 푹 빠져들어 읽던 그때 그 책은 무엇이었더라. 언젠가 아빠와 함께 갔을 때 내 손으로 고른 『제인 에어』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내게 그 서점은 만남의 광장이자 청소년 시기를 풍성하고 내실 있게 다져준 다락방 같은 곳이기도 했다.
신촌 로터리에서 학교까지 올라가는 길에는 학교 이름을 딴 소박한 사회과학서점이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아늑한 그곳에서 평대에 깔린 책, 서가에 빽빽하게 꽂힌 책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알 만한 책, 영 모를 책, 대중적인 책, 어려워 보이는 책, 들고 있으면 뭔가 폼 날 것 같은 책…… 다양한 내용과 분위기의 책이 가득했다. 학내에도 서점이 있었건만 어쩐지 이 서점을 가장 많이 찾았고 그 시절 사거나 선물 받은 몇 권의 책은 수없이 이사하는 동안에도 이별하지 않고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대전 시내의 그 서점도 학교 앞 그 서점도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구 못지않게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던 그 시절 친구들도 이제는 시류에 발맞춰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시집이나 소설 면지에 짧은 메모를 써서 선물했던 낭만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갈수록 볼거리가 늘어나고, 온갖 미디어가 사람들의 시선과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어두려고 요란한 각축전을 벌이는 이때 책을 손에 든다는 건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또 “책은 부동산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만큼 집에 책을 쌓아둘 만한 공간적 여유가 부족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만 해도 이사를 할 때마다 견적을 내러 오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책을 보면서 한숨부터 쉬곤 했으니까, 책을 건사하며 산다는 건 요즘 같은 때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돌림노래처럼 하는 출판계지만 스마트폰에 온갖 OTT에, 인공지능까지 가세한 요즘은 책이라는 전통적인 미디어의 입지가 정말이지 위태위태해 보인다. ‘텍스트 힙’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논하며 “독서 붐은 온다”는 희망찬 전망을 내놓는 사람도 있지만, 오랫동안 정체되거나 축소되는 출판 시장의 규모와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책을 읽는 것과 책을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기에, 양서마다 줄줄이 대기자가 붙은 도서관 대출 목록을 보고 있자면 사지 않고 빌려 읽는 독자들의 열정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든다. 이쪽 분야 사람들은 그래서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놓은 책 중에서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독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읊조릴 수밖에 없다.
이런 주류의 흐름과 별도로 책의 매력은 변치 않는다. 가장 조용하고 느리지만 가장 내밀한 곳에 가장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매체라는 믿음을 나는 아직 버리지 않았다. 이미 늙어 있어서 좀처럼 늙지 않는, 질리지 않는 매력을 소유했다는 것도 좋다. 누군가 “바퀴(wheel)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발명품”이라고 했듯 책 역시도 그러하다. 단순하고 수천 년간 그 구조가 변하지 않았으며 문명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발명품을 나는 바퀴 말고는 책밖에 알지 못한다. 기능과 형태가 완벽하게 일치하고 구조 자체가 아름다우며, 최소한의 형태로 최대한의 기능을 수행한다. 상상력과 지적 자극, 그 떨림과 울림만으로 우리를 앞뒤로 때로는 위아래로 추동하며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서점은 사라지고 독자는 흩어졌지만, 이사 때마다 짐스럽게 따라오던 그 책들이 내 인생의 갈피마다 증인이자 상담가 그리고 결국에는 내 나이테가 되었다. 냉소적인 얼굴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든 “책 안 읽은 지 오래됐죠”라고 말하며 부끄러운 듯 자조 섞인 표정을 짓는 사람에게든 요즘 같은 때 책을 선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신나고 설레는 모험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다가는 안 하느니만 못 한 도박 같은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누군가의 서재에 내가 선물한 책이 꽂히고, 그가 어느 날 문득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 읽으며 다시 독자가 되는 꿈을 꾸어본다.
사실을 말하자면, 몇 번 시도하긴 했지만 아직 나는 좋은 모험가는 되지 못했다. 이건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종류의 모험은 아니다. 상대방의 취향과 관심사와 근황 같은 것을 세심하게 살필 줄 알아야 맞춤한 책을 선물할 수 있을 테다. 내가 읽고 좋았던 책, 이 나이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책 같은 걸 선물했으니 ‘모험’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꺼낸 것치고는 나도 참 안일했다. 읽지 않았다는 무심한 대답을 듣기도 하고, 다 읽었는지 차마 묻지 못한 채 지나간 이들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이 모험은 실패다. 아무리 그래도, 책 선물에 대한 후기가 야박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아! 서로의 생일에 원하는 책을 선물해주는 사이인 I선배만은 예외다. “책 선물이 가장 좋다”는, 나보다 훨씬 더 책을 사랑하는 I 선배와는 오랫동안 책을 선물하는 사이로 남고 싶다.
나를 저 멀리에 내려놓고 책 한 권을 제대로 여행하고 나면, 책을 덮는 순간 한껏 마음이 고양된다. 유진목 작가가 『재능이란 뭘까?』에서 말했듯 그 순간 절로 “좋은 시간이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책을 만드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책을 나누는 일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엮는 일이다. 홀로 침잠하면서도 함께일 방법을 나는 독서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고요한 고양을 되도록 많은 이가 경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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