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속 4N k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는다 Sep 07. 2020

예약할 때의 나를 소환해야 한다

취소할 수는 없어서 떠나는 여행

떠날 때의 나는 예약할 때의 나를 소환해야

온도와 습도와 하늘이 완벽한 어느 아침에 문득 집을 나서다가. 혹은 번아웃으로 물든 날들의 끄트머리쯤에 솟아오르는 충동. 아, 여행 가고 싶다. 여행.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해놓는다. 그 행위만으로도 이미 갑갑함의 절반 정도는 해소되고 막 기운이 난다.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이미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사실 예약을 하고 한두 달 동안 그 기분이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모아두어서 좋은 건 통장의 잔고뿐,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널렸으므로 그나마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만큼은 모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해소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니 한 달여 전에 여행을 꿈꾸며 품었던 욕구와 스트레스는 이미 몇 가지의 속풀이 노하우로 다 해소가 된 뒤인 것이다.

그렇게 여행에 수반되는 모든 일들이 다 귀찮아진다. 파우치에 들어갈 화장품을 고르고 간단 옷 몇 벌을 가방에 쑤셔 넣고(국내 여행 이박삼일 정도는 배낭 하나로 해결) 가는 곳 그 근처에 뭐가 맛있는지 알아보고... 하는 게 다 귀찮다. 소듕한 연차까지 낸 여행 당일 아침 이불속에서는 아 그냥 이렇게 밀린 잠이나 잘까, 는 생각을 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니 가장 만끽할 수 있는 여행은, 지금 떠나고 싶다 할 때 떠나는 것일 테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동승자까지 있으면 결국 취소는 할 수 없고, 기운을 끌어내어 억지로 출발을 한다. 그리고 여행 내내 예전만 한 텐션은 오르지 않고 일관된 감정으로 심드렁하다. 이런 일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반복되었다. 이것도 나이 탓일까? 이젠 새로운 곳보다는 수차례 가봤던 곳, 폭풍 검색할 필요가 없는 익숙한 곳으로 쉬러 간다.

어쩜 이제 더 이상 이삼십 대 때처럼 먼 여행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쌓아두었다가 폭발하는 힘, 스프링 같은 그 에너지가 여행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때라서 좋았듯 지금도 좋다. 아니 더 좋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갖게 된 일상 작은 해소법들은 더 오래 함께 갈 산소호흡기 같은 것이니까.



패스트힐링: 바쁜 일상 속에서 짧은 시간 간단한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는 일. 네이버 지식백과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