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와 습도와 하늘이 완벽한 어느 아침에 문득 집을 나서다가. 혹은 번아웃으로 물든 날들의 끄트머리쯤에 솟아오르는 충동. 아, 여행 가고 싶다. 여행. 그렇게간절한 마음으로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해놓는다. 그 행위만으로도 이미 갑갑함의 절반 정도는 해소되고 막 기운이 난다.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이미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사실 예약을 하고 한두 달 동안 그 기분이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모아두어서 좋은 건 통장의 잔고뿐,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널렸으므로 그나마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만큼은 모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해소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니 한 달여 전에 여행을 꿈꾸며 품었던 욕구와 스트레스는 이미 몇 가지의 속풀이 노하우로 다 해소가 된 뒤인 것이다.
그렇게 여행에 수반되는 모든 일들이 다 귀찮아진다. 파우치에 들어갈 화장품을 고르고 간단 옷 몇 벌을 가방에 쑤셔 넣고(국내 여행 이박삼일 정도는 배낭 하나로 해결) 가는 곳 그 근처에 뭐가 맛있는지 알아보고... 하는 게 다 귀찮다. 소듕한 연차까지 낸 여행 당일 아침 이불속에서는 아 그냥 이렇게 밀린 잠이나 잘까, 는 생각을 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니 가장 만끽할 수 있는 여행은, 지금 떠나고 싶다 할 때 떠나는 것일 테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동승자까지 있으면 결국 취소는 할 수 없고, 기운을 끌어내어 억지로 출발을 한다. 그리고 여행 내내 예전만 한 텐션은 오르지 않고 일관된 감정으로 심드렁하다. 이런 일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반복되었다. 이것도 나이 탓일까? 이젠 새로운 곳보다는 수차례 가봤던 곳, 폭풍 검색할 필요가 없는 익숙한 곳으로 쉬러 간다.
어쩜 이제 더 이상 이삼십 대 때처럼 먼 여행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쌓아두었다가 폭발하는 힘, 스프링 같은 그 에너지가 여행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때라서 좋았듯 지금도 좋다. 아니 더 좋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갖게 된 일상 속 작은 해소법들은 더 오래 함께 갈 산소호흡기 같은 것이니까.
패스트힐링: 바쁜 일상 속에서 짧은 시간 간단한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는 일.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