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소통
보편적으로 먼저 삶을 살아본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살 길 바라는 마음으로 삶의 방향과 하루의 일과를 권유할 때가 있다. 부모가 살아온 삶의 환경이 아이가 살아갈 삶의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아이를 선행시킨 부모의 교육방법이 아이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변수는 환경의 변화와 아이의 기질이다. 첫 번째 환경의 변화는 우리가 모두 체감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VUCA 시대이니 말할 것도 없다. 두 번째 변수인 아이의 기질은 다소 많은 데이터가 누적되어서 아이를 출산하고 난 후 등센서의 민감도, 낯가림의 여부 등으로 기질을 관측해 본다.
'누구 애는 한 번 재우면 8시간을 통으로 잔다더라.'로 시작한 부러움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누구 애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숙제도 잘한다더라.'로 이어진다. 나 조차도 엉뚱하고 산만하고 발랄한 아이보다 조용하고 진득하고 엉덩이가 무거운 아이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내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불혹의 나이를 먹어서도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용단을 내릴 수 있던 것은 나의 날 것 그대로를 인내해 준 부모님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어떤 의지를 가지고 아이를 지켜봤다기보다는 먹고살기 바빠서 내버려 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오히려 나의 독창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독창성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성취욕에 밀려날 때도 있었다. 글을 쓰는 것보다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우선시했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썼기 때문이다. 이 상충된 욕구에 대해 말한 사람이 있다. 애덤 그랜트.
애덤그랜트의 책 [오리지널스]에 보면 성취욕이 오히려 독창성을 죽이는 일이라고 한다.
누가 닦아놓은 길로 빠르게 달려갈 것이냐, 가지 않은 길을 일일이 밟아가며 만들어낼 것이냐는 확연히 다른 가치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지 않은 길은 물질적 성취를 뛰어넘는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떤 방향이든 일장 일단이 있으므로 무엇이 좋다고 편향된 취향을 갖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만큼은 되어서 감사하다. 다만 삶에 주도성을 가지고 몇 번 가다 말더라도 내가 생각해서 가 본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의 아이가 학교 내신 성적과 입시에 끼어 정작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할 시간도 없이 기계처럼 숙제만 해가는 모습을 맞닥뜨리니 부모로서 자괴감이 온다. 아이는 매일매일 쏟아지는 과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창의성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우스꽝스럽다. 내 인식이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것도 감사하다. 적어도 아이에게 시험에 점수를 잘 받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말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성공하고자 했던 욕구와 성공방법은 나에 국한된 모델이고 아이는 아이가 가진 고유한 환경과 기질에 따라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도록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또 깨닫는다.
한 번뿐인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보는 것만큼 멋진 일이 있을까? 나도 아이도 그런 멋진 삶을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