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의 소통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는 첫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이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였다. 생존 욕구도 지켜지지 못했던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저자의 삶을 읽어 내려가던 중에, 컵라면을 먹어가며 본인은 삶의 재미와 의미를 못 찾겠다고 말하는 중 2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무언가 아이러니했다. 대한민국의 사교육 현실을 꼬집으며 본인이 '왜 이 열차에 탑승해서 인생을 허비해야 하냐?'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어라 대답을 해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 녀석아, 우리 조상님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도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셨는데 배부른 소리구나.'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꼰대 같았고 아이도 전혀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문득 남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가 하나인 사람과 둘인 사람과 셋인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데 셋 다 삶이 고달프다는 푸념을 들었다면서 객관적으로 보자면 '누가 더 고달플까?'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이 했던 이야기가 아이가 하나 있을 때는 그때가 제일 힘들었고 둘이 있을 때에는 그때가 제일 힘들었고 셋이 있었을 때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처럼 각자 처한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은 처음이니 본인이 맞딱뜨린 어려움이 가장 어려운 것 아니었겠냐는 이야기였다.
그 대화를 떠오르고 아이를 보니 이 아이가 겪고 있는 고민이 새롭게 보였다. 지금 시대에 태어나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이의 고민을 내가 경시하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로 돌아갔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첫 번째의 의미를 보자면 나라는 존재가 끼치는 영향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창조와 일을 한다는 것이 물리적인 결과물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내뱉는 말과 태도도 포함될 수 있다. 나는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살겠는가? 예전에 남편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과 사고로 인한 무고한 죽음을 그냥 두고 보는가?' 그 물음에 나는 무어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주일 설교 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주님이 침묵하시는 가운데 이 세상의 악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그때 남편에게 해 주고 싶은 답을 찾았던 것 같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두 번째 의미로는 사랑이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아이가 경험하고 있는 사랑이 충분했던가 생각하게 되었다. 공기와 같이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숨 쉬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나는 아이에게 사랑을 부어주고 있었던가? 아이를 사랑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서는 어땠는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그 사랑이 넘쳐 타인에게 사랑을 부어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그 상상을 하니 컵라면을 먹으며 빈정대듯 이야기하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 아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제는 네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런 네가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니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네가 걷는 그 길의 한 걸음 뒤에 서서 네가 밟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며 너의 희로애락을 응원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 번째로 시련에 대한 나의 태도이다. 물론 저자는 의미를 발견하는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는 피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자신을 연민하고 세상을 탓하는 사람 대비 나를 돌아보고 나아갈 한 걸음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있는 것 같다. 나는 경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떤 불행한 일이 내게 내려왔을 때 나는 기도한다.
주님 이 가운데에서 제가 어떤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까?
우리 아이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기조를 따라가다 지쳐 절망을 느끼더라도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고유의 삶의 모습을 찾아가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조급함과 불안감을 감싸 안아주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격려해 주는 것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삶을 앞서 살아간다면 아이가 조금 더 용기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언젠가 읽을 아이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리고 네가 어떤 성인이 되어 어떤 영향을 세상에 끼칠 지도 매우 기대가 된다.